코멘트
1. 「첫머리는, 유독 그 한 곳만 나무로 뒤덮힌 집이 거리 한복판에 있고 그 집 주위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다. 주위에서 차츰 집이 사라지고 밭이 나타나며, 빌딩이 있던 자리는 숲으로 변하고 그 숲의 나무는 점점 작아진다. 자동차가 달리던 길이 어느새 논두렁으로 변하고, 주위의 주택들이 사라지면서 밭이 나타나고, 보도가 있던 자리에 수로가 나타나고, 그 사이에도 그 집의 큰 나무는 점점 작아지다가 거기에 사츠키들이 사는 집이 살짝 나타난다. 그곳에 삼륜차가 털털거리며 굴러온다는 이야기를 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다가 끝날 때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할머니 그럼 토토로는 이제 없어요?' 하고 물으면 할머니는 '글쎄, 있을까? 없을까? 하고 대답하죠. 그 후 네온이 보이는 도시의 숲 꼭대기에서 토토로가 쓸쓸하게 호우-호우 하고 울고 있어요. 그 소리는 소음에 묻혀 들이지 않지만 토토로가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풍경으로 끝내려 생각했었죠.」 (미야자키 하야오) p.30 그러니까 <이웃집 토토로>는 원래는 도시에서 과거를 돌이키는 내용이었다.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회상이라는 소리. 위 이야기 속 도시에서 토토로는 잊혀진 존재지만, 동시에 할머니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전해지는 존재다. 이 이야기가 담긴 다음 페이지에 있는 토토로의 초기 콘티에는, 빌딩이 빼곡한 도시 중간에 뜬금없이 울창한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나무는 토토로가 선물로 준 도토리를 심은 것. 사실 <이웃집 토토로>는 (도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골마을로 이사오는 가족을 보여주며 시작하기에 영화의 공간 배경은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감독이 구상했던 것은 도시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얘기였다는 점이 꽤 의미있게 다가왔다. 과거 안에서 종결지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전승되어지고 기억되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다. 이 영화는 정말로,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이 된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구나, 그리고 도시화 된 현대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토토로를 위한 것이었구나. 2. 배경 셀화를 보다가 알아챈 것. 낮에 사츠키네는 모든 창문을 열어놓는다. 그게 너무 좋다. 바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혹은 바람과 같이 사는 것처럼. 그리고 이 집은 알고 보니 아직 미완성이었다. 곧 집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채였다. 3. 토토로는 아마도,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모습부터 저녁놀이 피어오르고 모두 지는 순간까지의 하늘을 가장 성실하게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다. 심지어 실사 영화가 아닌데도. 작화 담당이었던 오가 카즈오의 말에서 조금의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실제 저녁때는 해가 한참 기울어도 하늘이 붉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빨갛다는 것은 정말 태양 주위를 망원렌즈로 크게 잡았을 때 붉게 보이는 정도로, 정말 붉어지는 것은 해가 저문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붉게 물들게 하지는 않도록 했습니다.」 (오가 카즈오) p.134 아주 멋진 관찰. 정말 붉어지는 것은 해가 저문 다음. 뒤늦게 붉어진다는 것. 마음을 닮았다. 일출도 그렇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붉다. 4. 「엔딩에서는 어쨌든 엄마가 돌아와야 합니다. 엄마가 돌아오는 부분은 본편에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같이 목욕도 하고, 한 이불에서 잠자는 의식을 치러야 하죠. 그 다음은 안심하고 밖에 놀러 나가서 나무에도 오르고, 싸움도 하고, 그러는 동안 토토로는 점점 멀어져서, 토토로와 만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로 좋습니다. 그러니까 토토로와 사츠키들이 같이 등장하는 그림은 한 장도 없습니다. 토토로는 변함 없이 도토리를 먹고 삽니다. 그래서 도토리가 떨어지는 가을이 되자 신이 나서 나무열매를 모으고 진수성찬을 즐기는 장면을 넣기도 했고, 그런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p.151 엔딩 크레딧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코멘트. 슬프고 당연하고 아름답다. 그저 지나가는 한 시절을 나눴던 토토로. 그런데 동시에 토토로는 언제나 누군가의 부재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도 했다. <이웃집 토토로>를 생각할 때마다 왜 이 영화는 항상 죽음을 암시하는 상황의 곁에서 진행될까 싶었다. 병에 걸린 엄마, 비가 오는 날 유난히 늦는 아빠, 실종된 메이. 그 모든 걸 가장 커다랗게 맞닥뜨린 사츠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츠키의 영화이기도 했다. 사츠키는 죽음을 이 시절만큼 온 몸으로 두려워할 수 있을까. 이런 이상한 질문.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고도 느꼈다. 부모님이 조금만 늦어도 집에서 혼자 두려움에 벌벌 떨던 나. 온갖 상상을 다 했었지. 고아가 되면 어떻게 살게 될까. 확장되어가던 상상.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은 집에 왔고 그 시절은 점차 지나가고 우리는 무뎌진다. 사츠키는 일상으로 돌아와 메이와, 친구들과, 엄마와 논다. 이 엔딩크레딧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비로소 그 그림자가 걷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질감을 느꼈나 보다. 그런데 그 이질감도 좋았다. 사츠키를 아무렇지 않게 지켜준 토토로는 그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일상을 즐겁게 여행한다. 어쩌면 토토로는 죽음과 삶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존재를 초월한 존재 같다. 죽음의 두려움마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토토로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 오카리나 소리는 대체 어디서 들려오고 있는 걸까? 5. <이웃집 토토로>만의 특별한 디테일. 빛의 사용, 아이들의 감정, 흙의 종류 등 전부분을 아우르는. 아래는 그런 점이 드러나는 몇몇 부분을 발췌했다. 「이 영화를 하면서 생각했는데, 외국이나 다른 세계를 무대로 한 작품을 만들 때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엄청나게 마음에 걸리더군요. 예를 들면 일본의 집은 기본적으로 전부 남향으로 설계하잖아요? 마당에 섰을 때 어느 쪽에 그림자가 지는지 분명합니다. 5월이라면 집안에 아침해가 비친다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 빛이 드는가, 그런 게 애니메이션에서는 참 곤혹스러워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대강 해치우지만(웃음). 보통 집은 여름에 해가 비쳐도 차양이 달려 있어서 툇마루까지는 볕이 들지 않아요.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막도록 되어 있지요. 정남향으로 집을 짓고 서쪽에 건물을 좀 튀어나오게 해서 ㄱ자로 만들면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일몰이 다가와도 강한 서쪽 햇볕이 방까지 들어오지 않죠. 혹은 볕이 들어올 때 발을 친다거나,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가 있는 겁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고 서쪽에서 쨍쨍 빛나고 있을 때 집안은 어두컴컴하고 밖은 환히 빛나는 것이 아마 일본의 여름 풍경일 겁니다.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니까 일본의 영화에서 계절감이나 토속성이 안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메라멘 미야카와 카즈오 씨도 말하더군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빛을 쓰지 않는다'. 라고. 즉 모든 것이 형광등 조명이라는 겁니다. 일본 가옥은 바깥 풍경 없이 집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도 아침저녁이나 계절감이 나옵니다. 햇빛이 어디까지 들어오는가, 방안과 밖이 어떤 어둠의 콘트라스트를 갖고 있는가로 표현되니까요. 그런 설정을 확실히 하면 다들 공통된 풍토에 사는 일본인이므로 계절감이 전해질 거라고 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p.166 「부모들은 아이들을 겉으로만 보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태연히 잠을 잘 수 있다니, 아이들은 역시 천진난만하다"라고요. 하지만 사실 아이들은 태연이고 뭐고가 아니라,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라 자기방어를 위해 잠을 자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고 있는 것은 사실 가장 힘들어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p.129 「정원 등 흙에 대해서는 미야자키 씨가, 관동 롬층의 적토가 대부분이니까 빨갛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흙이란 검정이나 회색 등 그다지 색감이 없는 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부감이 꽤 있었지만, 그래서 점점 빨갛게 하면서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할 때마다 미야자키 씨는 '아니 아직, 더 빨갛게!' (웃음) 그래서 저렇게 붉은색이 나온 거죠」 (오가 카즈오) p.84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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