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지정생존자
4.0

브이아이피
영화 ・ 2016
평균 2.7
[브이아이피]는 권력형 스릴러를 다루는 영화다. 이런 영화들이 그렇듯이 권력을 등에 업은 권력자에게 항거불능의 피해를 당하는 내용은 대부분 살인 아니면 강간이다. 범죄 중 가장 흉악한 범죄가 살인과 강간이기 때문에 이 주제 의식에서 가장 명백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라서 그렇다. 그런데 [브이아이피]에서 권력자는 북한의 권력자로 등장한다. 굉장히 신선한 부분. 대체로 이런 미션을 받으면 대부분의 디렉터들은 한국의 권력자를 상상하거나 많이 나가도 동맹국인 미국 정도를 떠올린다. 그런데 [브이아이피]에서 박훈정은 북한의 권력자 2세를 등장시키고 있다. 마치 [베테랑]의 조태오와 비슷하지만 [브이아이피]에서 이종석은 역대급의 언터쳐블 귀공자로 등장하는데 그 사유가 다름아닌 북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의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북한이란 주적이고 강간범은 쓰레기다. 그런데 주적과 쓰레기가 합쳐지자 아예 통제 불능의 범죄자가 탄생했다. 어느 정도 견제가 가능한 한국이나 미국의 권력자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의 캐릭터다. 더군다나 이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은 일부 비평계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던 여성각성제 타령을 하지 않는다. 김명민은 여성 피해자로 인해서 분노했다기 보다는 그냥 광기어린 형사이고. 장동건이 마지막에 이종석을 죽이는 이유도 딱히 여성 피해자와 관계가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종석, 김명민, 장동건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경찰, 검찰, 국정원이 각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서 여성 피해자들이 고립되는 이유는 대단히 철저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국의 진부한 스릴러 영화들. 진부한 여성주의 영화들과는 굉장히 궤가 벗어나 있는 세팅이다. 일반적으로 특히 한국의 여성주의 스릴러 영화에서 여성들은 나쁜 남자들을 만나는 바람에 고립된다. 하필이면 나쁜 형사. 하필이면 나쁜 남편. 하필이면 나쁜 회사 동료. 하필이면 나쁜 이웃이 여성을 고립시킨다. 이 세팅은 굳이 하려면 못할 것은 없지만 진부하고 인위적인 세팅값이다. 그런데 [브이아이피]에서 여성 피해자가 고립되는 세팅값의 인과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드라이한 상태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드라마에서 왜 경찰, 검찰, 국정원이 저렇게 행동해야만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너무나도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들이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 따라서 [브이아이피]가 제공하는 지옥의 디자인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의표를 찌르면서 엄청난 강도의 압도적인 파토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브이아이피]가 줄곧 당해온 비난과도 연결되는 지점을 가지는데 마치 박찬욱의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실제로 혀를 가위로 짤랐는지에 대해 누군가는 봤다고 하고 누군가는 못봤다고 하듯이. 마치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자넷 리의 누드를 어떤 검열관은 봤다고 하고 어떤 검열관은 못봤다고 하듯이. [브이아이피]의 고수위 장면이라는 것도 누군가는 봤다고 하지만 역시 누군가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브이아이피]가 가지고 있는 표현 수위는 오히려 상당히 낮은 편에 가깝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잔혹함의 정서는 모두 드라마의 힘에서부터 도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타이틀이다. 제목 [브이아이피]는 극중 이종석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북괴 강간범을 뜻하는 단어다. 한국 사회가 가장 배척하는 두 종류의 사람 종북 간첩. 그리고 강간범. 이 둘을 합쳐놓고 권력을 등에 업자 이종석은 한국 사회의 브이아이피가 됐고 이웃 나라 왕자 자격으로 여행을 와서 취미 활동으로 강간을 하다가 유유자적 북한으로 떠난다. 이 정도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아이들 소꿉장난 수준이다.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이라는 타이틀을 냈을 때도 당시(에는 세력이 미약했던)의 레디컬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었었는데 단순히 살인이 추억인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제목이 무려 [브이아이피]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압도적인 상태다. [브이아이피]는 권력의 속성을 굉장히 잘 그려내는 영화다. 만약에 이 영화의 배경이 현재라면 어떨까. 이종석의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순간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은 급락하고 통일 사업은 모두 물거품이 되면서 다음 정권은 해보나마나 보수당에게 넘겨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투명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전체 국민의 1%도 안되는 레디컬이 문재인 정부를 끈기있게 지지해 줄 것도 아니다. 레디컬은 어차피 이렇게 해도 욕하고 저렇게 해도 욕한다. 민주당 지지층도 역시 둘로 갈라져서 미친듯이 싸우게 될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문재인 정부 역시 [브이아이피]에서 정부가 선택한 선택들과 비슷한 선택들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다. 권력은 개인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권력은 언제나 전체를 위해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