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Withoutflatwhite

Withoutflatwhite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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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에로이카

영화 ・ 1970

평균 3.5

살면서 한 번 정도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 요시다 기주의 급진주의 삼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인 <연옥 에로이카>는 일반적인 카메라 구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면으로 거부하며 거의 모든 장면들을 최고 수준의 시각 예술로 끌어올린다. 오프닝 샷부터 카메라는 보통의 영화들보다 훨씬 높은 각도에서 불안정하게 위치한다. 여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걷는 동안, 프레임의 4/5는 주차장 지붕이 차지하고 있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프레임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그리고 인물들이 밖으로 나오면, 카메라는 그들을 조롱하듯 황무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와이드하게 인물들을 잡아낸다. 그들은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제대로 설 자리가 없다. 카메라 구도 외에도 거울을 활용한 반사 이미지들과 그로테스크한 사운드 역시 환상적이며 모든 것이 합쳐진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놀라운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주인공 '쇼다'는 레이저 광선 사업을 기획하고 연구중인 엔지니어이다. 영화는 그의 아내가 스스로를 미아라고 주장하는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오며 시작된다. 난해하지만 어느정도는 이해 가능한 초반 10분이 지나면 서사 장악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관객을 '영화적 미아'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파괴되어 있다. 무작위적으로 튀어나오는 과거와 미래에, 한 술 더 떠서 그 어느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아예 영화를 이탈한 초현실적 장면들까지. 아마 살면서 본 난해한 영화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관객에게는 3~4가지 정도의 제한된 정보만이 주어진다. 첫 번째로 현재 엔지니어인 주인공 ‘쇼다’는 과거 50년대 일본 급진주의 혁명 단체의 일원이었다. 두 번째로 그가 가담한 단체는 미국 대사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세 번째로 그 계획은 제대로 실행도 되기 전에 실패했으며 단체 내부에선, 조직 내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러가지 추측만은 가능할 것이다. 혁명에 실패한 이들은 시간이 흐르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체제 안의 구성원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의 잠재의식 아래에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살아 숨쉰다. 레이저 광선의 성질은 직진하는 것이다. 확산을 해버리는 전파와 빛과는 다르게 레이저는 방해하는 물질이 있다면 그 조직을 파괴하고 통과해버린다. 굳이 도식적으로 본다면 '쇼다'의 현재 직업은 그가 몸담았던 급진주의와 병렬된다. 또한 미아인 동시에 모두가 자신의 부모님이라 주장하는 '소녀'는 '쇼다'의 실패한 기억을 각성시키는 매개체이다. 억눌려져 무의식 속의 망령으로써만 존재하던 '쇼다'의 기억은 '소녀'의 출현으로써 실체화된다. 영화 중간 "모든 아버지를 죽여야된다"는 '소녀'의 연설은 국가 정치인들을 암살하고 체제를 전복시키려던 젊은 혁명가들과의 연관성이 있을수도 있고,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꿈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겠다. 소녀의 실제 아빠로 보이는 남자는 '쇼다'와 20년전 같은 단체에 속해있던 것으로 보이나 (동일한 배우가 연기함), 이들은 서로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한 가지의 말에도 많은 진실이 있어요", "증명하는 이의 승리입니다" 라는 남자의 발언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파괴되어 있는 이유처럼 들린다. 실패한 이들에게 역사를 집필할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연옥이라는 단어를 영화 제목으로 처음 알게 되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가톨릭 교리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의 큰 죄는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며 영혼들은 연옥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한다고 한다. <연옥 에로이카>는 혁명의 실패 이유보다는 내부분열로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멸했던 이들의 공허함을 다루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