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kawah_ee

kawah_ee

4 years ago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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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책 ・ 2012

평균 3.8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10.31) . 나의 어떤 부분은 절망으로 잠들 줄 모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의 또 다른 부분은 생각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잘것없는 일들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건 병이라는 느낌.(10.31) . 오늘 오후 다섯 시경. 모든 것이 서서히 질서를 회복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건조한 외로움. 그 끝에 나 자신의 죽음. 목 안에 덩어리.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둘러 차를 끓이고, 편지를 마지막까지 쓰고, 물건을 치운다. 마치 집 안을 새로 정리해서 이제는 "나" 혼자 살기에 편안한 집으로 만들려는 것처럼(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건 결국 나의 절망감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가 이제 글쓰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11.4) . 울적한 오후. 잠깐 장을 보러 가다. 제과점에서 (별 생각도 없이) 피낭시에 하나를 산다. 작은 여 점원이 손님을 도와주다가 말한다: 부알라(voila). 마망을 돌볼 때 그녀에게 필요한 걸 가져다줄 때면 내가 늘 말했던 단어. 거의 돌아가실 즈음, 한 번은 반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녀는 메아리처럼 그 단어를 따라 했었다: 부알라(나 여기 있다라는 그 말. 그녀와 내가 평생 동안 서로에게 했던 말.) 여 점원이 무심코 흘린 이 단어가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운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슬픔은 그러니까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구체적인 일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가 있다. 생각보다 나의 근심 걱정이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일종의 가벼움 혹은 자기관리가 그런 일들 속에서는 가능하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11.5) . 슬픔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그러자 뒤따르는 일말의 죄의식. 때로 스스로 생각한다, 나의 지나친 슬픔은 결국 너무 예민한 나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평생 그렇지 않았던가: 항상 너무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던가?(11.10) . 한편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이런저런 일에 관여를 하고,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면서 전처럼 살아가는 나. 다른 한편으로는 갑자기 아프게 찌르고 들어오는 슬픔. 이 둘 사이의 고통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아서 더 고통스러운) 파열 속에 나는 늘 머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 있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이 망가져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나의 괴로움은 그러니까 이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11.21) .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나의 불쾌함)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나는 모자라는 게 없다, 내 생활은 전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라는 것.(11.24) . 바티 노바(Vita nova)는 래디컬한 몸짓이다(어떤 단절을 수행하기-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끝내기, 그 필연성). 내게 가능한 길은 둘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두 길: 1.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과거의 나를 뒤집기) 2. 순응하기, 편안함을 사랑하기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기) (11.30) .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1978.1.22.) . 사람들은 (예컨대 마음이 상냥한 세베로의 경우) 슬픔의 이유를 아주 당연한 것처럼 일상적인 현상들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광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넌 사는 게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구나?- 그런데 나의 "삶"은 잘 흘러간다, 아무것도 일상 속에서 모자라는 게 없다; 하지만 아무런 외적인 장애가 없어도, "돌발적인 사건"들이 없어도, 그 어떤 절대적인 결핍의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그건 "슬픔"이 아니다. 그건 순수한 비애다 -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으로도 상징화할 수 없는 그런 결핍감.(6.13) .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24) . 겨울 정원의 사진: 나는 이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사진: 너무도 분명한 것을 그러나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래서 문학이 탄생한다) "순진 무구함":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 마망은 내게 가르쳐 주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절대로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걸.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의 "순진무구함"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정의다.(7.24)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중개자가 된다는 사실. 중요한 조건들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의 지주대가 된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