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나탈리 레제
애도 일기: 1977년 10월 26일~1978년 6월 21일
후속 일기: 1978년 6월 24일~1978년 10월 25일
이후에 쓴 일기: 1978년 11월 4일~1979년 9월 15일
날짜 없이 남아 있는 단장들
마망에 대한 몇 개의 메모
해설 / 김진영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 에세이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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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히는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다.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는 1977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 다음 날부터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이 일기는 2년 뒤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바르트는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책상 위 조그만 상자에 이 쪽지들을 모아두었다. <애도 일기>는 <밝은 방>과 더불어 롤랑 바르트의 후기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지적인 여정에서든 글쓰기의 여정에서든 이 후기 스타일을 결정짓는 근간은 바로 ‘죽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던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깊은 슬픔이 있다. 바르트는 이 아름답고 슬픈 텍스트에서 상실의 슬픔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파헤치고, 내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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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롭게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패인 고랑.”
― 1977년 11월 9일 일기에서
“바르트에게 사랑의 대상은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르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 상실되었으므로 그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 또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패인 고랑’으로만 남는다.” ―김진영, 「해설」에서
* 『뉴욕타임스』 선정 TOP 10(2010년)
* 『슬레이트』 『타임스문학부록』 선정 최고의 도서(2010년)
1. 롤랑 바르트의 후기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발견
이 책은 ‘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히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다.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 1893~1977)는 1977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 다음 날부터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이 일기는 2년 뒤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바르트는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책상 위 조그만 상자에 이 쪽지들을 모아두었다. 현대저작물 기록보존소(IMEC)에 간직되어 있던 『애도 일기』의 원고는 분리된 쪽지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략되는 내용 없이 다시 편집되어 2009년 쇠유(Seuil)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애도 일기』는 『밝은 방』과 더불어 롤랑 바르트의 후기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지적인 여정에서든 글쓰기의 여정에서든 이 후기 스타일을 결정짓는 근간은 바로 ‘죽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던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깊은 슬픔이 있다. 바르트는 이 아름답고 슬픈 텍스트에서 상실의 슬픔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파헤치고, 내지른다.
2. 격렬한 슬픔의 습격해올 때마다 써내려간 육체의 비명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는 1893년에 태어나서 스무 살 때 루이 바르트(Louis Barthes)와 결혼했고, 스물세 살 때 전쟁미망인이 되었다. 롤랑 바르트가 한 살 때 루이 바르트가 해군장교로 전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특별한 관계는 바르트가 1976년 62세 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어머니를 불러와 맨 앞자리에 앉혀 놓고 취임강연을 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질책한 적이 없었다.”는 바르트가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 어머니를 “관대함”, “선함”의 상징으로 이야기할 때 하는 말이다. “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어른이 되지 못한 “늙은 아이”였던 바르트는 어머니와의 사랑이 끊어지자 거의 2년에 걸쳐 그의 외로움, 격렬한 슬픔,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서 재생된 삶에 대해 써내려갔다. 슬픔이 습격해올 때마다 짧게 써온 이 일기들은 텍스트를 넘어서는 절편적 글쓰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떤 구상도 없고, 체계화나 언어화가 되기 전에 멈추어버린, 바르트의 육체의 언어이자 비명이었던 셈이다.
3. ‘사랑을 잃어버린 슬픔’에 대한 집요한 추적
기호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현대 세계에서 가장 활력적인 사유를 펼쳤던 바르트의 지적 커리어는 크게 어머니의 죽음 전과 죽음 후로 나눌 수 있다. 『애도 일기』를 써나가던 2년 사이에 바르트는 『밝은 방』을 집필했다. 또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라는 프루스트에 관한 강연을 했고,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구상했던 소설 “비타 노바(Vita Nova)"의 스케치를 했고, 「소설을 준비하면서」의 강의를 계획하기도 했다. 사실 이 모든 작업들은 또 다른 애도 일기들이었다.
『밝은 방』은 “사진에 대한 노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적어도 『애도 일기』와의 관계에서는 사진론 텍스트가 아니라 슬픔에 관한 텍스트이다. 『밝은 방』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슬픔에 젖어 있지만, 제목에서처럼 빛이 있다. 그 빛이 작렬하면서 사랑이 죽음에 대해 승리하는 엑스터시의 체험, 사진 체험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났다!”라고 바르트가 경이에 차서 외치듯, 『밝은 방』의 근본적인 사건은 사진을 통해서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즉 푼크툼(punctum)의 순간에 죽은 어머니가 바르트에게 ‘온전한 현존’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애도 일기』에서는 끝내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해소하지 못한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행위가 가능했던 『밝은 방』에서와 달리 『애도 일기』의 시기에 오면 바르트는 자신의 죽음과 만난다. 어머니의 죽음 후 끊임없이 죽음충동에 시달렸던 바르트는 『애도 일기』가 끝난 이듬해(1980년) 2월, 길을 건너다가 작은 트럭에 치인다. 사고는 경미했지만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했고 그는 한 달 뒤 사망한다. 1979년 5월 1일 일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나는 마망과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동시에) 죽지 못했다.”



134340
4.5
슬픔은 마망의 마지막 가르침. 가장 지독한 수업.
서희정
3.0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지금 집에 와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rizu
3.5
사랑하는 이의 영원한 부재와 단절. 그 슬픔과 괴로움은 아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익숙해질 뿐이라는 것.
허성완
4.5
<위르트에서>는 작업 내내 "제목미정" 상태였어요. 편집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책을 찾아보았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제목이 정해졌어요.
유려
4.0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뿐이다.
혀녕
5.0
“내면 안에 머물기, 조용히 있기, 혼자 있기. 오히려 그때 슬픔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kawah_ee
3.5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10.31) . 나의 어떤 부분은 절망으로 잠들 줄 모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의 또 다른 부분은 생각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잘것없는 일들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건 병이라는 느낌.(10.31) . 오늘 오후 다섯 시경. 모든 것이 서서히 질서를 회복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건조한 외로움. 그 끝에 나 자신의 죽음. 목 안에 덩어리.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둘러 차를 끓이고, 편지를 마지막까지 쓰고, 물건을 치운다. 마치 집 안을 새로 정리해서 이제는 "나" 혼자 살기에 편안한 집으로 만들려는 것처럼(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건 결국 나의 절망감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가 이제 글쓰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11.4) . 울적한 오후. 잠깐 장을 보러 가다. 제과점에서 (별 생각도 없이) 피낭시에 하나를 산다. 작은 여 점원이 손님을 도와주다가 말한다: 부알라(voila). 마망을 돌볼 때 그녀에게 필요한 걸 가져다줄 때면 내가 늘 말했던 단어. 거의 돌아가실 즈음, 한 번은 반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녀는 메아리처럼 그 단어를 따라 했었다: 부알라(나 여기 있다라는 그 말. 그녀와 내가 평생 동안 서로에게 했던 말.) 여 점원이 무심코 흘린 이 단어가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운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슬픔은 그러니까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구체적인 일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가 있다. 생각보다 나의 근심 걱정이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일종의 가벼움 혹은 자기관리가 그런 일들 속에서는 가능하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11.5) . 슬픔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그러자 뒤따르는 일말의 죄의식. 때로 스스로 생각한다, 나의 지나친 슬픔은 결국 너무 예민한 나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평생 그렇지 않았던가: 항상 너무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던가?(11.10) . 한편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이런저런 일에 관여를 하고,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면서 전처럼 살아가는 나. 다른 한편으로는 갑자기 아프게 찌르고 들어오는 슬픔. 이 둘 사이의 고통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아서 더 고통스러운) 파열 속에 나는 늘 머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 있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이 망가져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나의 괴로움은 그러니까 이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11.21) .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나의 불쾌함)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나는 모자라는 게 없다, 내 생활은 전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라는 것.(11.24) . 바티 노바(Vita nova)는 래디컬한 몸짓이다(어떤 단절을 수행하기-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끝내기, 그 필연성). 내게 가능한 길은 둘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두 길: 1.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과거의 나를 뒤집기) 2. 순응하기, 편안함을 사랑하기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기) (11.30) .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1978.1.22.) . 사람들은 (예컨대 마음이 상냥한 세베로의 경우) 슬픔의 이유를 아주 당연한 것처럼 일상적인 현상들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광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넌 사는 게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구나?- 그런데 나의 "삶"은 잘 흘러간다, 아무것도 일상 속에서 모자라는 게 없다; 하지만 아무런 외적인 장애가 없어도, "돌발적인 사건"들이 없어도, 그 어떤 절대적인 결핍의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그건 "슬픔"이 아니다. 그건 순수한 비애다 -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으로도 상징화할 수 없는 그런 결핍감.(6.13) .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24) . 겨울 정원의 사진: 나는 이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사진: 너무도 분명한 것을 그러나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래서 문학이 탄생한다) "순진 무구함":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 마망은 내게 가르쳐 주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절대로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걸.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의 "순진무구함"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정의다.(7.24)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중개자가 된다는 사실. 중요한 조건들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의 지주대가 된다는 사실.
김토마
4.5
2019년 4월 24일 시카고 내 아파트에서 그 사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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