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애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평균 3.4
2024년 05월 27일에 봄
어떻게 보든 본인 마음이라는 둥, 건너뛸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게 잘못이라는 둥, 창작자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발언에 처음엔 화부터 났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선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그들과 5시간짜리 영화를 한자리에서 집중해서 감상하는 내가 궁극적으로 같은 문제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엔 음악을 소비하는 방법이 그랬다. 에어팟을 구입하기 전까지는 아이팟클래식으로 음악을 들었었는데, 30곡 다운 요금제를 사용 중이었던 당시에는 어떤 곡을 다운 받을지 매달 고심하며 노래를 고르곤 했다. 그래서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에어팟을 구입한 후로는 블루투스 기능이 없는 아이팟클래식을 서랍 한켠에 넣어두고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요금제는 더 이상 다운로드가 아닌 무제한 스트리밍을 사용했다. 지금도 같은 요금제를 사용 중이다. 언제든 원하는 만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무제한 스트리밍 요금제는 편리했지만 그만큼 희소성은 사라졌다. 더 이상 고심해서 음악을 듣지 않았다. 분명 즐겨듣는 노래인데 가사가 잘 안 외워지고, 1년쯤 지나면 멜로디도 더러 잊기 시작하던 때도 딱 그쯤부터였다. 비단 영화와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흐름이 이런 식이다. 유재석이 핑계고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튜브가 대중화되면서 예능인들이 다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예전에는 어떤 연예인이나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 그 인기가 최소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도 갔는데 요즘은 일주일을 가지 않고 나날이 짧아지고 있어서 고민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였다. 신곡이 발매될 때마다 온갖 챌린지가 범람하고 바이럴을 타지만 정작 음악은 3분이 채 넘질 않으며 차트는 매일 새롭게 갱신된다. 순수문학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지만 라이트노벨과 웹소설 시장은 확대되는 추세다. 기사와 블로그보다는 140자짜리 트위터 글이나 인스타그램의 카드뉴스와 웹진을 선호한다. 틱톡은 1020의 지지를 필두로 폭발적으로 부상했으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숏츠와 릴스라는 숏폼을 개발했다. 넷플릭스는 몇 년 전 배속재생 기능을 추가했고, 유튜브에선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해 주는 콘텐츠가 인기를 얻고 있다. 나는 스마트폰의 등장, 정확히는 SNS의 출현이 이 모든 현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SNS의 창립 목적은 캐주얼한 정보 공유와 소통이었다. 그래서 SNS는 종류를 불문하고 누구든 자유롭게 글을 남기고 제스쳐 한 번이면 실시간으로 피드가 업데이트 되는 신속 간편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또한 관심 있는 대상만 팔로우하고 보고 싶지 않은 유저는 뮤트하거나 차단할 수 있다. 수동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알고리즘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히 알고리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SNS는 물론이고 포털사이트, 쇼핑, 내비게이션 등 알고리즘은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왓챠피디아조차 그렇다. 물론 알고리즘이 아니었다면 어떤 영화는 영영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알고리즘이 일방적으로 제공해 주는 정보로 인해 나의 세상이 제약받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극우세력이 결집하는 이유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원하는 정보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에선 누구나 편협해지기 십상이다. 세계는 다원화되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불통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험을 반추시켜 보면 세상과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나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였다. 나와 가치관도 취향도 전혀 다른, 심지어 언어도 인종도 다른 타인을 이해할 때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층 넓어졌었다. 마치 이 책을 읽고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지금의 흐름은 기술의 발달과 사회가 맞물리면서 발생한 필연적인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적 흐름을 방패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자신은 없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눈뜬장님이 되지 않도록, 때로는 알고리즘이 마련해준 안락한 세상에서 나오는 연습을 조금씩 해나갈 것이다. 몇 년 전에 셀린 시아마의 <걸후드>를 보고 지각 있는 관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오늘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