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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전성시대
평균 3.3
창수는 과연 순정적 멜로드라마의 화신인가? 창수는 영자와 비슷한 하위직업 변천 양상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고뇌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수의 하위로서의 삶은 영자와 더불어 하위의 삶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팔자에 따라 종속적으로 살아가는, 의도치 않게 국가적 폭력의 논리를 내재화한 인물일 뿐인 것이다. 이는 아래 몇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 월남전 월남으로 가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이 주는 외화를 벌어 돌아온다. 창수가 잃어야 하는 팔은 영자가 잃은 채였고, 창수는 전쟁의 죄책감을 영자를 통해 동질감으로 치환시키는 '윤리적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영자에게 헌신하는 듯 그녀를 야만의 세계에서 구출하는 계몽적 존재를 자처한다. 결국 하위주체를 관리하고 교화시키려던 근대화 담론과 공모하는 셈이다. - 주사 영자와의 성행위 이후 성병에 걸린 창수는 영자의 뺨을 때리며 화를 내고 영자를 병원으로 데려가 지속적인 성병 치료를 시킨다. 순정남 창수가 돌연 영자에게 화를 내는 모습은 ‘안락하고 건강한 섹스’를 하기 위한 국가 정책으로서의 기지촌 여성 관리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 의수 의수를 달아줌으로써 영자를 멀쩡한 신체를 지닌 국민의 일원으로 만들어 국가적 폭력을 은폐한다. 그녀에게 계속 갖는 온정적 태도는 자신을 전쟁과 근대화의 폭력적 확장에 희생되는 대상들을 구원해주는 계몽적 존재로 위치시키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을 슬그머니 폭력의 카르텔에서 제외하지만 이런 시선은 근대의 폭력적 담론이 인간애적인 재무장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하위타자 창수는 꿈이었던 양복점의 사장, 고용주가 된다. 창수의 지인이 창수의 양복점에 찾아 와 영자를 어디선가 봤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 창수는 자기 아래 있는 시다에게 맥주를 사올 것을 명령한다. 원작의 창수는 1970년대의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음을 무의식적인 바람을 통해 드러내는 것에 반해, 영화의 창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또 다른 노동자인 양복점 시다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듯 순정파 남성의 멜로적 성향이 철저히 강조된 창수는 그 스스로가 시대를 향한 하위주체적 기반을 지녔음에도 하위타자에 머문다. 특히나 결말은 창수와 절름발이 남편의 동의 아래 영자 또한 하위타자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자에게 정착을 허락하는 듯 해피엔딩을 꿈꾼 감독의 무리한 봉합이자, 하위주체를 구현하고자 했지만 당시의 구조화된 하위타자화의 경향이 창수라는 캐릭터로 내면화되어 나타난 결과다. 그들의 체제 아래 외팔이 영자는 절름발이 남자와 결합할 수밖에 없다. 즉 <영자의 전성시대>는 70년대를 살아가던 하위주체의 모습이 나타나는 동시에 가장된 하위주체, 즉 하위타자적 균열이 함께 나타난 작품이다. 더불어 하위주체란 존재와 그들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한없이 하위타자화시킨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다. 결국 이 작품은 창수라는 위선적 폭력을 넘어 국가적 폭력으로 확장되는, ('호스티스 영화', '문예영화' 등이 아닌) 리얼리즘의 측면으로 파악되어야 합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