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동구리

동구리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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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의 빛

영화 ・ 2024

평균 2.7

이 영화는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오랜 시간 정재훈의 신작을 기다려왔을 관객이라면 더욱이.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던 이 프로젝트는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이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벌인다는, 일견 단순한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는 15명의 이름이 각본가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정재훈 감독은 자신이 세팅해둔 세계 위에서 섭외한 배우들이 직접 이야기를 쓰게끔 했다. 어떻게? 트위터의 서브컬처로 자리잡은 '자캐커뮤' 혹은 전통적인 TRPG의 방식처럼 배우들이 각자 '롤'을 받고 세계의 설정과 롤에 맞추어 상황을 이어나간다. 이를 일종의 릴레이 소설이라 이해할 수도, 혹은 자넷 머레이와 이안 보고스트가 '절차적 수사학'이라 부르고 에스펜 올셋이 '에르고딕 서사'라 부르는 게임연구 및 서사연구에서의 이론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이론들을 곧장 영화에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같은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시뮬레이터 게임과는 다르게, <에스퍼의 빛>은 그렇게 진행된 세 개의 '플레이 세션'을 영화화한다. 따라서 영화는 총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이야기만들기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관객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지 않는다. _ 정재훈 감독은 GV에서 이들을 '배우'가 아니라 '플레이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일종의 다큐멘터리라 여긴다고 말했다. 물론 <에스퍼의 빛>은 각본과 연기로 채워져 있으며, 특촬물, 괴수물, 판타지 등의 장르에서 길어온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 혹은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에서나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유명사들도 그러하다. 감독이 말하기로, 자신은 몇몇 설정과 지명 등의 세계관을 플레이어들에게 주고 이야기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드러내려는듯 트위터의 UI를 가져온 텍스트를 계속 띄운다. OA(Operator Account)가 상황을 제시하면 거기에 맞추어 선택지를 고르거나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연기와 영상으로 구현하며, 이 텍스트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제작에 사용되었을 트위터 계정들은 여전히 검색 가능하다(대부분이 비공개 계정이라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는 정재훈의 말을 따라 <에스퍼의 빛>을 다시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자캐커뮤' 혹은 ' TRPG'의 방식을 따라 서사가 절차적으로 생성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물론 각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촬영이 진행된다는 익숙한 극영화의 제작방식을 따르지만, 영화는 플레이 과정을 영화 곳곳에 새겨넣음으로써 제작방식 자체를 영화 안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플레이어이자 자신의 롤을 연기하는 배우인 이들의 형상은, 마치 디지털 세계에 들어가면 옷차림이 바뀌는 <디지몬>의 '선택받은 아이들'처럼 양측을 오간다. _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밌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숙한 SF 장르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배신감을 선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 대신 무수한 얼굴 클로즈입이 러닝타임을 채우는 1장,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소리로 가득한 2장, '컴퍼니'라는 미지의 존재에 속박된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 3장의 이야기가 딱히 연결성을 갖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첫 영화인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정재훈의 앞선 두 영화, 감독 스스로 '4DX 어드벤처물'로 명명한 <도돌이 언덕의 난기류>와 기이한 여행영화인 가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퍼의 빛> 또한 익숙하게 호명되는 장르적 틀을 멀찍이 벗어나 나른 방식의 체험을 요구한다. 점점 많은 영화, 특히 액션이나 SF 등의 장르영화를 중심으로 소위 '게임적 서사'라는 것이 스며들어오는 상황에서, <에스퍼의 빛>은 주어진 세계와 이야기의 각색이 아니라 이야기의 게임적 생성이라는 실험을 시도하고 그 결과물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의 기록이며 생성의 체험이다. 흔하게 상상되는 영화의 재료들을 멀찍이 벗어나 기이한 모습을 빚어내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