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미인

홍등
평균 3.9
2020년 05월 28일에 봄
패왕별희를 보다 공리에 치여 시름 앓다가 쓴다. 정말 공리가 먼저야.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때는 200여년 전이었고 그시절 사람들이 인식하는 해피니스는 행운만을 의미했다. 다만 불행은 지금이나 그때나 인생의 전제였기에 그 반대적 의미에 대해 사람들은 어렴풋이 상상해 볼 따름이었고 행복이란 컨셉이 막 태동하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반대의 의미로 여긴다. 행복. 행복이란 단어 자체도 가소롭지. 복됨이 깃들다니. 전통적으로 종교가 기복신앙이었던 것을 따져보면 애초에 복은 사람 손에 달린 일도 아니란 건데. 혹은 우리 말에도 개념 자체가 없어서 행운을 의미하던 단어를 느슨하게 가져다 쓴 걸 수도 있고 영화에서의 홍등도 점등과 멸등만 존재한다. 허나 대부분의 시간에 홍등은 꺼져있고 어느 순간 등이 켜진다 해도 그 상태는 지속되거나 축적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홍등이 본래 벤담이 다루려던 쾌락적 행복과 의미적으로 더 맞닿아 있는 지도 모른다. // 깨진 홍등을 남몰래 모으고 남의 홍등 밑에서 서성 거리는 장면들. 홍등은 언제나 다른 이가 키고 다른 이로부터 꺼졌다. 나 역시 남의 손에 만들어진 홍등 때문에 불행했고. 내 자신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의미 두려 하지 않아도 매 순간 자연스레 얽매이게 되고. 그 사람의 말에. 원래 있지도 않았다던 행복이란 개념에도. 오늘은 또 얼마나 멀리 걸어야 될런지. 그냥 겁이 나서 적어봤다. 의미를 두지 않는 것에는 정말로 절절한 연습이 필요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