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김성진

김성진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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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책 ・ 2017

평균 4.0

2023년 08월 02일에 봄

상대를 정의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잃는 이야기 필먼 박사의 인터뷰로 시작하는 이 놀라운 이야기는, 첫장부터 우리가 읽으려는 이야기가 쉽지 않음을 짐작케하며 시작된다. MBTI가 T인듯한 필먼 박사는 인터뷰 내내 단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방문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짧은 프롤로그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노변의 피크닉'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가장 친절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다. 얼마전에 리뷰했던 대실 해밋의 작품처럼 발생하는 일만 묘사될 뿐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어떤것도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그들이 아무런 목적이 없이 방문했고, '방문'으로 인해 지구에 이런 현상들이 생겼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그것이 인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어떻게 깨닫고 그 사실을 공유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두뇌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무의미한 상관관계를 찾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쓰임'과 '목적', '이유'라는 단어들로 변주되어 마치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며 등장인물의 목을 조인다. 레드릭 슈하트는 그러한 인간적인 인식의 굴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외계 문명의 부산물들이 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던(그저 돈만 되는 것들) 그는 시간이 지날 수록 구역과 현상에 종속된다. 결국 바라지조차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욕심이 생기게 되고 딸의 회복과 부를 위해 '금빛 구체' 를 찾으러 간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면 그는 하나의 짐승이 되고 타他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하나의 객체가 되고 만다. 내 생각에는 레드릭 슈하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잃고 타자에 의해 정의되고 구속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는 2장의 젊은 레드릭 슈하트가 정신을 다잡으며 탐사조를 이끄는 것과 대비된다. 결국 이 이야기는 타인(좁게 보면), 혹은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을 정의하지 못함으로 인해 나(또는 우리)를 잃게 되는 이야기로 읽힌다. 즉, 지구에서 의미없이 쉬다 떠난 외계의 존재가 무엇이고, 그들이 남기고 간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도리가 없기에, 인간 스스로가 거짓 인과를 만들고 거기에 종속되어버린 이야기 인 것이다. 조금 더 넓게 본다면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 바깥의 존재를 정의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무너지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놀라운 접근이다. 무언가 말은 쉽지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안에 남을 가두고 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간다. 인간의 인지와 인식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용한지 말해주는 소설. 이런 어마무시한 이야기를 부연설명을 붙이거나 구구절절한 서사를 통해 풀지 않고 주요 화자의 인식 범위 내에서만 진행한다. 이 또한 대단하다. + 하나의 관점이 더 있는데 만약 이야기의 주체를 외계문명, 구역에 잠시 머물렀다 떠난 이들의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이런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이는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즉,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말라는 소리다. 이건 아무래도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을 법한데 러시아 역사는 잘 모르니 천천히 공부해보도록 해야겠다. 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