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포투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평균 4.0
〈부뒤〉를 너무나 손쉬운 부르주아 풍자극이자 레스탕그와 씨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 것은 르누아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뒤〉는 단순히 무질서를 옹호하는 것도, 질서를 공격하는 영화도 아니다. 레스탕그와씨는 모순도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비추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부뒤는 그가 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지기에 그렇다. 후에 그가 부뒤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볼 때, 그 둘의 관계를 두고 (프롤로그에 등장한) 자신의 상상과도 같았던 프리아포스와 님프의 그것에 빗댄다는 점에서 비춰지는 바이다. 되려, 이 영화는 흥분의 공간인 도시와 자연, 그리고 그 둘을 잇는 파리와 (파리지앵이 부르는) 노래를 보여준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쓴 표현 '성기로서의 도시'는 얼마나 적절한가!). 영화가 끝나는 지점의 두 쇼트는 정작 부뒤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보는 것은 양 옆으로 엠마와 안-마리를 안고 있는 레스탕그와씨의 모습과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면 두 여자를 낀 레스탕그와씨의 이미지에 익숙할 것이다. 흔히 'ménage à trois (3명의 가정)'이라 불리는 관계의 표상과도 같은 이미지다. 이를 잇는 마지막의 이미지는 파리의 거리를 행진하듯이 '흥분'의 노래를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이 '흥분의 노래'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에서 거듭해 등장하며, 서로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마치 몰래 약속했다는 것처럼 같이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이때 언급한 노래와 함께 다양한 음악/노래의 배치는 토키 영화로서의 〈부뒤〉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암캐〉와 반대 지점에 놓인 듯한 이 영화의 사운드 사용이 그가 토키 영화를 만든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뤄지고 있음은 르누아르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디제시스의 안(또는 밖)에 놓인 음악이 거듭하며 반복된 후 다른 위치에 놓이는 사운드 배치를 즐겨 쓰며 이 사운드의 이동은 부뒤의 경로와 매우 유사하다. 이의 가장 대표적 예는 극에서 등장하는 플룻 연주다. 이때 플룻 연주는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의 경계로 작용하는, 일종의 연극 무대의 대목을 가르는 것처럼 제시된다. 연극의 막(act)을 나누듯이 등장하면 일반적으로 디제시스 외부의 소리일텐데, 〈부뒤〉의 플룻 연주는 의도적으로 그 연주자를 카메라에 담아 이를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서 주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플룻 소리가 처음부터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플룻 소리는 프롤로그에서 디제시스 밖의 소리로 가장 먼저 등장했다. 이때 우린 당연히 연극 무대의 소리라 여기고 객관적 사운드에 놓이지만, 영화가 '현실'로 입장하며 주관적 사운드로 바뀌는 것이다. 플룻 소리의 등장은 영화의 러닝타임에 걸쳐 5번 등장한다; 1) 디제시스 밖: 영화의 타이틀 카드와 함께 화면에 등장 2) 디제시스 안: 플룻을 부르는 사나이가 나오며 파리의 숏이 이어짐 3) 디제시스 안: 부뒤가 구조된 날의 밤에 같은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4) 디제시스 안: 다음 날 아침 씬이 시작하기 전 동일한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5) 디제시스 밖: 파리의 거리에 서 있는 부뒤만이 숏에 등장하며, 창가의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음. 처음처럼 다시 객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이는 때(플룻 연주자가 등장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공간 밖에서 소리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는 레스탕그와 씨의 집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 즉 등장인물 모두의 불륜과 욕정이 발각나는 장면의 전조로 흐를 때이다. 〈부뒤〉에서 (특히 플룻의) 음악은 부뒤처럼 흥분과 욕정의 전조로,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로 위치를 옮길때 욕망은 탄로난다. '기존 도덕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레스탕그와씨는 하녀 안-마리와 부뒤의 결혼을 주례한다. 이제 부르주아 안으로 들어온 부뒤는 물에 띄워진 꽃들을 만지려 하고, 이 와중 배를 전복시킨다. 후에 그를 찾지 못한 부르주아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부뒤는 도망친걸까, 죽은걸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애초에 부뒤는 본인이 원해서 물을 떠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물에 들어간 부뒤는 타자에 의해 물에서 빠져나왔고, 다시 본인의 의지대로 세느 강의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말로 형용하기 힘든 순간들이 등장한다. 부르주아의 옷을 버리고 허수아비의 옷을 갈아입는 숏, 강에 흐르는 부뒤의 모자의 리듬 같은 순간들은 이 영화를 감싸는 아우라가 된다. 그리고 부뒤의 '물'에 대한 이런 행동은 〈부뒤〉를 정의내리기 힘들게 만들며, 그가 뛰어내린 다리의 이름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라는 점을 저절로 연상시키게 만든다. 부뒤가 홀로 헤엄쳐 부르주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목격한 이상 우리에게 그의 자살 시도는 일종의 '예술' 같은 위치에 놓인다. 그가 물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그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들은 음악을 다시 듣는다.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의 위치에 범람하는 것을 우린 영화에서 다시 보며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갔다는 듯의 감각을 깨닫는다. '물'에 의해 만들어진 난장판으로 매혹시키는 이 방랑자의 몸짓만큼 르누아르적인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