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석
2 months ago

에로스 + 학살
평균 3.5
힘 풀린 육체의 나른한 신음에 취한 채 그것마저 사랑이고 자유라고 호기롭게 외치 던 예술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혁명이란 단어에 스민 달콤함만 좇다 죽어가는 세계의 핏발 서린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영화, 허울 좋은 미명으로 뻔뻔히 제 몸을 둘둘 싸매기 바빴던 연극, 번번이 쇠퇴로 끌리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활자, 부릅뜬 눈으로도 여기 고인 피 웅덩이를 보지 않은 사진. 그 모든 것은 죽어 실패한 시대의 무덤에 제 몸을 누인다. 녹아내린 셀룰로이드, 부서진 혁명의 슬로건은 그렇게 사방이 캄캄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반면, 절망하는 영화의 시선으로 바라본 두 남녀의 뒷모습은 꽤나 당차 보였다. 그렇게 과거를 잊혀지게 두고 간 사람들은 무슨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들은 내내 자신들을 무대 위로 끌어내던 운명적 거대서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 왠지 답을 알 것도 같다. 아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테지. 그 낙관에 불을 지핀 것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제 품에 모신 은판이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라고 자처하던 젊은이들도 결국 똑같은 내일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