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미안해요 래리(이성현)

미안해요 래리(이성현)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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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 2023

평균 3.8

첫 숏이 나무가 우거진 하늘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게 숲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숲을 거니는 건지 의도를 모호하게 하는, 처음부터 미스테리라는 분위기를 장착한다. 다음으로 비춰지는 하나는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타쿠미가 일을 하는 모습을 상당히 천천히, 자세하게, 정적으로 비춘다. 그의 가족이 먼 옛날 여기에 정착하기 위해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자연과의 거리감을 좁혀 가는 끝에 결과적으로 일부가 되는 건, 이 첫 시퀀스가 느리게 영화에 스며드는 방식과 같음을 보여준다. 그 느린 시간이 층층이 쌓여 풀과 사슴과 나무와 물이 어떤 형태로 그들을 맞이하더라도 타쿠미와 그의 주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흘려 보내고, 자연 또한 주민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하든 물 흐르듯 수용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층화된 시간이 잉태한 산물인 하나는 자연과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순수한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는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에 외지인이 끼어들며 국면이 전환된다. 글램핑을 명목으로 자연의 일부가 될 자격을 무시하고, 스며드는 게 아닌 점령을 목적으로 접근하니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하지만 덮어놓고 욕을 먹는 이 남자와 여자에게도 속사정은 있다. 그들도 이게 힘들다는 걸 안다. 상관이 명령하니, 그저 따른다. 자연에서 상류는 상류의 책임을 지고, 하류는 하류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속세에서도 그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회동이 원만하게 끝나지 않고, 상관들을 설득하는데도 실패한 그들은 타쿠미를 설득하러 그들이 억지로 점령하려는 자연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을 카메라는 상당히 길게 보여주는데, 두 인물의 보다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 글램핑 프로젝트에서의 상황과 비슷하게, 그들은 이 일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낀다. 심지어 남자 다카하시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그 개조된 자연 속에 머무를 것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 그렇게 만난 타쿠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장작을 패고 있다. 앞서 다카하시는 자연에 머무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언급했는데,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감히 도끼를 들어 본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르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인간세계에 완벽히 동화되었기에, 어쩌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바라보던 타쿠미가 다카하시에게 조언하고, 받아들인 다카하시는 마침내 성공한다. 그에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여기 머물고 싶다는 욕구를 한 층 끌어올린다. 타쿠미는 물까지 그들과 함께 뜨며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기는 대목까지, 오프닝에서의 동일한 시퀀스와 비교하면 샷의 구도까지 거의 동일한데,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든다. 물까지 뜨고 난 뒤 다카하시의 의욕은 급격하게 상승한 듯 보인다. 여기서 여자와 다카하시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여자는 타쿠미의 조언에 따르기만 한다면, 남자는 그를 넘어 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타쿠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나름 설득 해보려고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질문 몇 번에 애써 만든 탑은 와르르 무너진다. 자연에 스며들었는가의 유무가 이런 사소한 질문에서마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카하시 일행과 타쿠미의 역할이 각각 속세의 대변인과 자연의 대변인으로서 대응된다는 것이다. 다카하시 일행은 속세가 자연에게 하고픈 말을 전달하고, 타쿠미는 자연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전수한다. 다만 타쿠미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고, 다카하시는 상관의 하수인이다. 그러던 중 하나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타쿠미는 딸을 찾아 길을 나선다. 의욕 넘치는 다카하시는 그를 따르고, 여자는 집에 머무른다. 그렇게 하루종일 찾아 헤맨 끝에 안개 속에서 하나를 찾는다. 그 순수함의 결정체는 사슴과 독대하고 있다. 다카하시는 혹시 사슴이 아이를 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그녀에게 달려가는데, 타쿠미가 그를 쓰러뜨리고는 이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타쿠미가 사슴에 대해 언급했던 게 있다. 사슴이 인간을 언제 공격하는지. 사슴이 총에 빗맞았거나, 총에 맞은 사슴의 부모가 공격하거나. 이를 제외하면 공격하지도 않고 피할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의 상황처럼 공격하지도 않고 피하지고 않는다는 건 동족을 마주했을 때일 것이다. 하나는 가장 순수한 존재로 자연과 동일시된, 이미 그 자체로 사슴이다. 그 사슴의 아버지인 타쿠미 또한 사슴으로 치환된다. 충분히 평화로운 상황에 난입하여 정적을 깨뜨리는 다카하시라는 외세는 타쿠미라는, 사슴이자 자연의 대변인에게 상처를 만들었고, 그 결과로 처형당한다. 이는 또한 그의 동료와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카타르시스에 눈이 멀어 자연의 규칙을 무시하고 강제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 한 형벌이 되기도 한다. 그 후 타쿠미는 하나를 확인하는데 이미 몸은 딱딱히 굳어 있다. 자연의 제1법칙인 가족을 지키는데 실패한 타쿠미가 오프닝과 같이 드넓고 미스테리한 숲속을 거닐며 영화는 끝난다. 처음과 끝은 전부 같고 단지 하늘의 색만 다를 뿐인데, 그 미스테리의 톤이 훨씬 으스스한 느낌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다카하시를 죽이는 이 엔딩이 마냥 선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간사한 심리를 파고들어 그것을 비트는 관념의 전복이다. 이러한 시선은 <열정>부터 최근의 <우연과 상상>까지 꾸준히 확인된다. 우리는 자연에 인간이 침입하는 플롯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악하고, 자연이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내면화한다. 그렇기에 속세에 침입하려는 다카하시가 살상당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에서 혹자는 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은 그 어느 주체라도 객체가 흉악범이 아닌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다카하시가 자연에 들어온 궁극적인 이유도 자의가 아니다. 그는 무고하다. 아무리 자연이라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하마구치의 필모를 통틀어서 가장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인간의 통념을 비틀어 인간과 자연 모두가 악한 성질을 내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작이 더 대단한 건, 여기서 관객의 시각을 한 번 더 비튼다는 점이다. 극중 뜬금없는 사운드가 귀를 자극하고, 혹은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다 이내 갑자기 끊긴다. 내러티브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고 거리감을 두라는 감독의 조언이다. 시점의 주인을 알 수 없는 숏도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시점의 주인에 대한 해답은 초월적인 존재밖에는 없는데, 바로 자연이다. 이 영화는 초월적인 시선으로 전개되며, 끊임없이 몰입하지 말라며 곳곳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즉, 어떤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우리는 극의 엔딩같이 일반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기현상도 바라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는 다시 영화의 내재적 주제와 연결되어 자연은 그 어떤 외세나 인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도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내용 또한 자연의 입장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그 초월의 시선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치 데이빗 린치의 작품과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미스테리함을 내내 풍기며 파편화된 서사가 분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허나 린치는 이를 관객들에게 전부 맡기며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우리를 복돋는데 반해, 하마구치는 자연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 시선에 토씨 하나도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고히 한다. 이제 그는 미스테리의 방향성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