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5.0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질서는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 질서로부터 야기된 행위를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관념의 몫이다. 문명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상류'와 '하류'의 구조는 복잡하게 얽히고 무수히 전복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러한 구조를 신화적이고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빌려 탈피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숭고하게 느껴진다.좋아요306댓글5
미안해요 래리(이성현)4.5첫 숏이 나무가 우거진 하늘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게 숲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숲을 거니는 건지 의도를 모호하게 하는, 처음부터 미스테리라는 분위기를 장착한다. 다음으로 비춰지는 하나는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타쿠미가 일을 하는 모습을 상당히 천천히, 자세하게, 정적으로 비춘다. 그의 가족이 먼 옛날 여기에 정착하기 위해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자연과의 거리감을 좁혀 가는 끝에 결과적으로 일부가 되는 건, 이 첫 시퀀스가 느리게 영화에 스며드는 방식과 같음을 보여준다. 그 느린 시간이 층층이 쌓여 풀과 사슴과 나무와 물이 어떤 형태로 그들을 맞이하더라도 타쿠미와 그의 주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흘려 보내고, 자연 또한 주민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하든 물 흐르듯 수용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층화된 시간이 잉태한 산물인 하나는 자연과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순수한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는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에 외지인이 끼어들며 국면이 전환된다. 글램핑을 명목으로 자연의 일부가 될 자격을 무시하고, 스며드는 게 아닌 점령을 목적으로 접근하니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하지만 덮어놓고 욕을 먹는 이 남자와 여자에게도 속사정은 있다. 그들도 이게 힘들다는 걸 안다. 상관이 명령하니, 그저 따른다. 자연에서 상류는 상류의 책임을 지고, 하류는 하류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속세에서도 그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회동이 원만하게 끝나지 않고, 상관들을 설득하는데도 실패한 그들은 타쿠미를 설득하러 그들이 억지로 점령하려는 자연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을 카메라는 상당히 길게 보여주는데, 두 인물의 보다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 글램핑 프로젝트에서의 상황과 비슷하게, 그들은 이 일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낀다. 심지어 남자 다카하시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그 개조된 자연 속에 머무를 것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 그렇게 만난 타쿠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장작을 패고 있다. 앞서 다카하시는 자연에 머무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언급했는데,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감히 도끼를 들어 본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르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인간세계에 완벽히 동화되었기에, 어쩌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바라보던 타쿠미가 다카하시에게 조언하고, 받아들인 다카하시는 마침내 성공한다. 그에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여기 머물고 싶다는 욕구를 한 층 끌어올린다. 타쿠미는 물까지 그들과 함께 뜨며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기는 대목까지, 오프닝에서의 동일한 시퀀스와 비교하면 샷의 구도까지 거의 동일한데,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든다. 물까지 뜨고 난 뒤 다카하시의 의욕은 급격하게 상승한 듯 보인다. 여기서 여자와 다카하시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여자는 타쿠미의 조언에 따르기만 한다면, 남자는 그를 넘어 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타쿠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나름 설득 해보려고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질문 몇 번에 애써 만든 탑은 와르르 무너진다. 자연에 스며들었는가의 유무가 이런 사소한 질문에서마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카하시 일행과 타쿠미의 역할이 각각 속세의 대변인과 자연의 대변인으로서 대응된다는 것이다. 다카하시 일행은 속세가 자연에게 하고픈 말을 전달하고, 타쿠미는 자연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전수한다. 다만 타쿠미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고, 다카하시는 상관의 하수인이다. 그러던 중 하나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타쿠미는 딸을 찾아 길을 나선다. 의욕 넘치는 다카하시는 그를 따르고, 여자는 집에 머무른다. 그렇게 하루종일 찾아 헤맨 끝에 안개 속에서 하나를 찾는다. 그 순수함의 결정체는 사슴과 독대하고 있다. 다카하시는 혹시 사슴이 아이를 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그녀에게 달려가는데, 타쿠미가 그를 쓰러뜨리고는 이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타쿠미가 사슴에 대해 언급했던 게 있다. 사슴이 인간을 언제 공격하는지. 사슴이 총에 빗맞았거나, 총에 맞은 사슴의 부모가 공격하거나. 이를 제외하면 공격하지도 않고 피할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의 상황처럼 공격하지도 않고 피하지고 않는다는 건 동족을 마주했을 때일 것이다. 하나는 가장 순수한 존재로 자연과 동일시된, 이미 그 자체로 사슴이다. 그 사슴의 아버지인 타쿠미 또한 사슴으로 치환된다. 충분히 평화로운 상황에 난입하여 정적을 깨뜨리는 다카하시라는 외세는 타쿠미라는, 사슴이자 자연의 대변인에게 상처를 만들었고, 그 결과로 처형당한다. 이는 또한 그의 동료와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카타르시스에 눈이 멀어 자연의 규칙을 무시하고 강제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 한 형벌이 되기도 한다. 그 후 타쿠미는 하나를 확인하는데 이미 몸은 딱딱히 굳어 있다. 자연의 제1법칙인 가족을 지키는데 실패한 타쿠미가 오프닝과 같이 드넓고 미스테리한 숲속을 거닐며 영화는 끝난다. 처음과 끝은 전부 같고 단지 하늘의 색만 다를 뿐인데, 그 미스테리의 톤이 훨씬 으스스한 느낌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다카하시를 죽이는 이 엔딩이 마냥 선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간사한 심리를 파고들어 그것을 비트는 관념의 전복이다. 이러한 시선은 <열정>부터 최근의 <우연과 상상>까지 꾸준히 확인된다. 우리는 자연에 인간이 침입하는 플롯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악하고, 자연이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내면화한다. 그렇기에 속세에 침입하려는 다카하시가 살상당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에서 혹자는 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은 그 어느 주체라도 객체가 흉악범이 아닌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다카하시가 자연에 들어온 궁극적인 이유도 자의가 아니다. 그는 무고하다. 아무리 자연이라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하마구치의 필모를 통틀어서 가장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인간의 통념을 비틀어 인간과 자연 모두가 악한 성질을 내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작이 더 대단한 건, 여기서 관객의 시각을 한 번 더 비튼다는 점이다. 극중 뜬금없는 사운드가 귀를 자극하고, 혹은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다 이내 갑자기 끊긴다. 내러티브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고 거리감을 두라는 감독의 조언이다. 시점의 주인을 알 수 없는 숏도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시점의 주인에 대한 해답은 초월적인 존재밖에는 없는데, 바로 자연이다. 이 영화는 초월적인 시선으로 전개되며, 끊임없이 몰입하지 말라며 곳곳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즉, 어떤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우리는 극의 엔딩같이 일반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기현상도 바라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는 다시 영화의 내재적 주제와 연결되어 자연은 그 어떤 외세나 인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도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내용 또한 자연의 입장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그 초월의 시선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치 데이빗 린치의 작품과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미스테리함을 내내 풍기며 파편화된 서사가 분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허나 린치는 이를 관객들에게 전부 맡기며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우리를 복돋는데 반해, 하마구치는 자연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 시선에 토씨 하나도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고히 한다. 이제 그는 미스테리의 방향성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좋아요242댓글3
양기연4.5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단언하는 카메라가 여기 존재한다. . (스포일러) .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설명회 장면, 지역 주민들 측의 질문과 도시에서 내려온 사업체 측의 답변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때 카메라는 서로 마주보고 앉은 지역 주민 측과 도시 사업체 측 사이에 가상의 선을 둔 채 양측을 번갈아 돌아보는 방식으로 그 문답의 장면을 이어나가야 한다. 글램핑장 건설 사업을 두고 대립하는 양측 각각의 시선을, 카메라는 매번 반대편의 쪽에 서서 반대편의 시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번갈아 마주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역 주민 측의 질문을 들을 때에는 도시 사업체 측에 서서, 도시 사업체 측의 답을 들을 때에는 다시 지역 주민 측에 서서. . 그 씬에서 타쿠미는 말한다. 자신들도 결국에는 이 땅에서 모두 외지인이라고, 다만 균형이 중요한 것이라고. 마을 회장도 말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에서 흐르므로, 상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그 땅이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 자신이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도시 사업체 측과 일종의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자신도 결국 외지인의 입장에서 자연 그 자체와 일종의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 앞서 카메라가 설명회 씬에서 도시 사업체 측의 시선과 지역 주민 측의 시선을 각각 대신하여 상대측을 번갈아 바라보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카메라가 외지인과 현지인의 중간에 서서 각각의 시선을 번갈아 담지하려 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아가 타쿠미가 한 말에 입각하여 본다면, 타쿠미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 곧 다시 외지인으로서 자연 그 자체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 대립 관계에 있어서도 각각의 시선을 담지하려는 시도에 나선 바 있다. . 타쿠미가 땅 와사비를 발견하는 숏에서, 카메라는 현지인을 대표하는 자연물인 땅 와사비의 시선에서 타쿠미를 바라본다. 이후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나오는 숏에서, 카메라는 외지인을 대표하는 인공물인 자동차 후미의 시선에서 자동차 뒷편을 바라본다. . 이러한 시도는 퍽 대담해 보인다. 카메라가 그 중간에 서서 자연과 인간, 도시 주민과 지역 주민 그 각각의 시선을 대신하는 시도를 통해, 마치 그 양쪽 모두를 대변하는 매개가 될 수 있으리라는, 어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고 할까? . 사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타쿠미와 마을 회장 등 지역 주민들이 '균형'과 '책임'을 말할 때에도 드러나 보인다. 지역 주민들은 설명회 내내 도시 사업체 측에 어떤 기준들을 왜 사업체 측에서 자의적으로 정하느냐고 따진 바 있다. 그 연장선 상에서 그들이 균형과 책임을 언급할 때, 이는 마치 자신들 스스로도 자연을 상대로는 외지인의 입장이긴 하나 '균형'을 지키며 '책임감 있게' 자연을 대한다는 자부심 섞인 말처럼 들린다. . 그러나 타쿠미가 영화 초반부터 수번에 걸쳐 장작을 패 땔감으로 쓸 때, 땅 와사비의 시선 숏에 이어 타쿠미가 곧바로 그 땅 와사비를 꺾어버릴 때, 설명회 씬에서 지역 주민 중 한 명이 그 지역엔 건조한 바람이 불어 산불 위험이 크다고 언급하였음에도 타쿠미가 숲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과연 그 균형과 책임의 기준을 누가 정한 것인지 그 주민들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 사실 지역 주민과 도시 사업체, 자연과 인간까지 거창하게 나아갈 필요도 없이, 영화는 곳곳에서 단순한 개인 간의 소통조차도 쉽지 않음을 프레임을 빌어 보여주고 있다. . 도쿄로 돌아간 도시 사업체 측 직원들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회의를 하나,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마주보는 컨설턴트는 애초에 상황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귀찮은 듯 보인다. 화상 통화를 가능케 한 그 또 다른 카메라 렌즈는, 원거리에 떨어진 직원들과 컨설턴트 사이에 대화를 가능케 하는 수준의 매개는 가능하나, 온전한 소통을 보장할 수는 없다. . 그리고 화상 통화가 종료된 이후, 그들 직원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장과조차도 소통이 불능임을 인지하게 된다. 카메라는 화상 통화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직원들과 사장을 종종 한 프레임에 담곤 했으나, 그들의 소통이 불능함이 확실해진 순간 직원들과 사장을 별개의 숏으로 아예 분리한다. 심지어 그때 사장으로 하여금 자기 뒤 벽 액자 프레임에 붙어 있는 그림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도록 함으로써, 카메라는 관객에게 이중의 프레임을 인지케 하여 직원들과 사장간의 거리감을 한층 강화한다. . 사장의 지시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를 설득하려 내려오는 차 안에서, 그들의 대화는 종종 턱 막히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 프레임 안의 데이팅 어플 알림이 또 다른 프레임을 그리며 등장한다. 모두가 서로 간의 소통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매번 그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그 이중, 삼중의 프레임이 강조하고 있다(타카하시의 데이팅 어플 알림 프레임이 기능하는 방식은 사실 실패한 관계의 흔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타쿠미의 집에 놓인 액자 프레임이 기능하는 방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 한 명의 사람과 다른 한 명의 사람 간의 관계마저도 이처럼 어려울진대, 지역과 도시, 자연과 인간, 그 사이를 매개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가. 타쿠미는 자신이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지역 주민들 간의 매개가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자신이 자연과 인간 간의 균형을 말할 때 그것이 오만할 수 있다는 점에 둔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 역시 아내와의 관계에 실패하였고, 딸의 귀가 시간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소바 주인에게 고작 180엔의 에누리도 받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퉁명스럽게 대화를 주고 받는 등 소통에 썩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가. .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타쿠미에게 관리인 역할을 맡아 지역 주민들과 도시 사업체 사이의 매개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타쿠미가 이를 거절하자, 타카하시는 갑자기 장작 패기에 한 번 성공한 데 감동하여 자신이 그 관리인 역할을 하고 싶어졌다며 자신의 어드바이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타쿠미는 '사슴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면 글램핑장을 그냥 둬도 되는 것 아니냐'는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그러면 사슴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며,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시선을 담지한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다. 장작 패기 한 번에 도시와 지역 간의 매개가 되리란 희망을 품는 타카하시의 얼굴에서, 타쿠미는 과연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오만하게도 균형을 말했던 자신의 거울을 보았을까? . 그러나 카메라의 오만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 하나가 실종되고, 타쿠미, 타카하시, 마유즈미가 하나를 찾아 헤매던 중, 물가에 이른 타쿠미의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 숏에 이어, 피가 묻은 풀의 숏이 등장하고, 꿩 깃털 숏이 등장한다. 이는 다분히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죽음을 유추하게 만드는 숏의 연결이다. 그러다 바로 뒤이어 타쿠미가 '하나가 여긴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피는 사실 마유즈미의 피였음에 드러난다. 그렇게 하나의 죽음의 순간이 유보된다. 이제 카메라는 지역-도시, 자연-인간을 넘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기를 욕망한다. . 그 뒤 마침내 그들이 하나를 발견한 순간. 총에 맞은 사슴을 하나가 마주하고 있다. 하나의 시선에서 사슴을 바라보는 숏. 그 뒤 사슴의 몸 숏. 사슴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 사슴의 시선에서 하나를 바라보는 숏. 하나는 모자를 벗는다. 카메라는 이 순간에도 사슴과 하나 각각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 특히 사슴이 하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숏은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똑바로 바라보는 숏과 일맥상통한다. 하나가 영화 내내 무해해 보일 정도의 태도로 숲속을 돌아다녔어도 그는 자연 그 자체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과 같이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총을 빗맞은 사슴은 자연과 하나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하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감히 그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말했던 자신의 오만을, 타쿠미는 자신이 타카하시를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으로 하나를, 어쩌면 자신을 바라본 사슴의 눈에서 발견한다. 결국 타쿠미는 자신의 오만하고도 혐오스러운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어 보이는 거울인 타카하시를 살해할 수밖에, 아니 그렇게 자신의 분신을 죽여 자살할 수밖에 없다. . 타쿠미는 자신이 감히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으로 인해 딸을 잃는 파국에 이르렀다. 그렇게 타쿠미가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자신의 분신을 죽여 상징적인 자살에 이른 그 순간조차, 지역-도시, 자연-인간, 나아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길 욕망했던 카메라는 자신의 오만을 포기하지 못한다. .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떠나는 모습을, 카메라는 안개 잔뜩 낀 풍광을 배경으로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뒤 어디선가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프레임 좌측으로부터 타카하시가 등장하더니 몇 발짝 걷더니 다시 쓰러진다. 우린 이미 그 전에 타쿠미가 타카하시의 목을 졸라 타카하시가 거품을 문 모습을 보았다. 설사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차라리 카메라가 피 묻은 풀 숏 등으로 하나의 죽음을 유보했다가 기어이 다시 하나를 죽인 것처럼 타카하시를 한 번 되살려 그 죽음을 유보했다가 다시 죽임으로써, 또 한 번 생과 사의 매개 역할을 욕망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엔딩 숏은 오프닝 숏과 똑같은 앙각으로 숲의 나무들을 올려다 보는 트래킹 숏이다. 다만 오프닝 숏과 달리 이번에는 헐떡이는 남성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남성이 멈춰서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 카메라도 멈추더니, 영화가 끝난다. . 오프닝 숏에서 엔딩 숏과 단지 시간대만 다른 채로 똑같은 앙각의 똑같은 트래킹 숏이 등장한 뒤, 바로 다음 씬에서 하나가 숲속을 거닐며 나무들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 등장하였던 바 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프닝 숏의 시선이 어쩌면 하나의 시점 숏일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묻어난 핸드헬드 숏이 아닌 기계적으로 스무스한 트래킹 숏이기에, 그 시선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기계(카메라)임을 관객은 인지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자신이 하나의 시선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카메라임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이다. 즉, 카메라는 카메라 자신인 채로 하나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 그리고 엔딩 숏. 우리는 그 이전에 타쿠미가 죽은 하나를 안고 가는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엔딩 숏은 앙각으로 찍혀 있고, 엔딩 숏 내내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우리는 그 숨소리가 타쿠미의 숨소리이고, 그 앙각은 하나가 죽은 채 타쿠미에게 들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테니 그 시선을 담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이 숏은 오프닝 숏과 마찬가지로 트래킹 숏이다. 딸을 안고 뛰는 아버지의 거친 움직임이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린 분명히 하나가 눈을 감고 죽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자는 누구인가? . 오프닝 숏에서 이미 카메라는 카메라 자신인 채로 하나일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연장선 상에서 극 내내 지역과 도시, 자연과 인간, 생과 사조차도 자유로이 매개할 수 있다고 자신해 왔다. 하나는 자연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타쿠미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자신의 분신을 죽여 일종의 자살을 했다. 그리고 엔딩 숏에 이르러 카메라는 죽은 하나의 눈을 대신한 자신의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자살한 타쿠미의 숨을 대신한 자신의 눈으로 호흡한다.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목에만 '선과 악', '존재와 부존재', '긍정과 부정' 세 개의 대립각이 존재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모든 대립 관계를 매개 혹은 초월하여 그 모든 이분법상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던 오만 끝에, 유사한 오만을 지닌 극중 인물의 사망으로 오히려 새 생명을 얻어 숨쉬는 카메라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고 이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기보다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는 카메라가 여기 존재한다].좋아요199댓글3
스테디셀러4.0세상 안의 악이 아니라 자연 안의 본능으로 바라보는 진기. 천천히 악셀을 밟아 자연을 그리다 힘껏 브레이크를 밟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풍경에 정확히 멈춰선다.좋아요150댓글1
이동진 평론가
4.5
나무와 사슴과 인간의 생사, 선과 악의 범주 자체에서 눈을 돌려 그 막막한 숲을 끝도 없이 올려다보면.
sirokryu
4.0
스포일러가 있어요!!
STONE
5.0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질서는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 질서로부터 야기된 행위를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관념의 몫이다. 문명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상류'와 '하류'의 구조는 복잡하게 얽히고 무수히 전복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러한 구조를 신화적이고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빌려 탈피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숭고하게 느껴진다.
미안해요 래리(이성현)
4.5
첫 숏이 나무가 우거진 하늘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게 숲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숲을 거니는 건지 의도를 모호하게 하는, 처음부터 미스테리라는 분위기를 장착한다. 다음으로 비춰지는 하나는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타쿠미가 일을 하는 모습을 상당히 천천히, 자세하게, 정적으로 비춘다. 그의 가족이 먼 옛날 여기에 정착하기 위해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자연과의 거리감을 좁혀 가는 끝에 결과적으로 일부가 되는 건, 이 첫 시퀀스가 느리게 영화에 스며드는 방식과 같음을 보여준다. 그 느린 시간이 층층이 쌓여 풀과 사슴과 나무와 물이 어떤 형태로 그들을 맞이하더라도 타쿠미와 그의 주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흘려 보내고, 자연 또한 주민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하든 물 흐르듯 수용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층화된 시간이 잉태한 산물인 하나는 자연과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순수한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는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에 외지인이 끼어들며 국면이 전환된다. 글램핑을 명목으로 자연의 일부가 될 자격을 무시하고, 스며드는 게 아닌 점령을 목적으로 접근하니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하지만 덮어놓고 욕을 먹는 이 남자와 여자에게도 속사정은 있다. 그들도 이게 힘들다는 걸 안다. 상관이 명령하니, 그저 따른다. 자연에서 상류는 상류의 책임을 지고, 하류는 하류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속세에서도 그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회동이 원만하게 끝나지 않고, 상관들을 설득하는데도 실패한 그들은 타쿠미를 설득하러 그들이 억지로 점령하려는 자연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을 카메라는 상당히 길게 보여주는데, 두 인물의 보다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 글램핑 프로젝트에서의 상황과 비슷하게, 그들은 이 일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낀다. 심지어 남자 다카하시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그 개조된 자연 속에 머무를 것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 그렇게 만난 타쿠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장작을 패고 있다. 앞서 다카하시는 자연에 머무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언급했는데,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감히 도끼를 들어 본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르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인간세계에 완벽히 동화되었기에, 어쩌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바라보던 타쿠미가 다카하시에게 조언하고, 받아들인 다카하시는 마침내 성공한다. 그에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여기 머물고 싶다는 욕구를 한 층 끌어올린다. 타쿠미는 물까지 그들과 함께 뜨며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기는 대목까지, 오프닝에서의 동일한 시퀀스와 비교하면 샷의 구도까지 거의 동일한데,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든다. 물까지 뜨고 난 뒤 다카하시의 의욕은 급격하게 상승한 듯 보인다. 여기서 여자와 다카하시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여자는 타쿠미의 조언에 따르기만 한다면, 남자는 그를 넘어 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타쿠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나름 설득 해보려고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질문 몇 번에 애써 만든 탑은 와르르 무너진다. 자연에 스며들었는가의 유무가 이런 사소한 질문에서마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카하시 일행과 타쿠미의 역할이 각각 속세의 대변인과 자연의 대변인으로서 대응된다는 것이다. 다카하시 일행은 속세가 자연에게 하고픈 말을 전달하고, 타쿠미는 자연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전수한다. 다만 타쿠미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고, 다카하시는 상관의 하수인이다. 그러던 중 하나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타쿠미는 딸을 찾아 길을 나선다. 의욕 넘치는 다카하시는 그를 따르고, 여자는 집에 머무른다. 그렇게 하루종일 찾아 헤맨 끝에 안개 속에서 하나를 찾는다. 그 순수함의 결정체는 사슴과 독대하고 있다. 다카하시는 혹시 사슴이 아이를 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그녀에게 달려가는데, 타쿠미가 그를 쓰러뜨리고는 이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타쿠미가 사슴에 대해 언급했던 게 있다. 사슴이 인간을 언제 공격하는지. 사슴이 총에 빗맞았거나, 총에 맞은 사슴의 부모가 공격하거나. 이를 제외하면 공격하지도 않고 피할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의 상황처럼 공격하지도 않고 피하지고 않는다는 건 동족을 마주했을 때일 것이다. 하나는 가장 순수한 존재로 자연과 동일시된, 이미 그 자체로 사슴이다. 그 사슴의 아버지인 타쿠미 또한 사슴으로 치환된다. 충분히 평화로운 상황에 난입하여 정적을 깨뜨리는 다카하시라는 외세는 타쿠미라는, 사슴이자 자연의 대변인에게 상처를 만들었고, 그 결과로 처형당한다. 이는 또한 그의 동료와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카타르시스에 눈이 멀어 자연의 규칙을 무시하고 강제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 한 형벌이 되기도 한다. 그 후 타쿠미는 하나를 확인하는데 이미 몸은 딱딱히 굳어 있다. 자연의 제1법칙인 가족을 지키는데 실패한 타쿠미가 오프닝과 같이 드넓고 미스테리한 숲속을 거닐며 영화는 끝난다. 처음과 끝은 전부 같고 단지 하늘의 색만 다를 뿐인데, 그 미스테리의 톤이 훨씬 으스스한 느낌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다카하시를 죽이는 이 엔딩이 마냥 선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간사한 심리를 파고들어 그것을 비트는 관념의 전복이다. 이러한 시선은 <열정>부터 최근의 <우연과 상상>까지 꾸준히 확인된다. 우리는 자연에 인간이 침입하는 플롯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악하고, 자연이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내면화한다. 그렇기에 속세에 침입하려는 다카하시가 살상당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에서 혹자는 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은 그 어느 주체라도 객체가 흉악범이 아닌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다카하시가 자연에 들어온 궁극적인 이유도 자의가 아니다. 그는 무고하다. 아무리 자연이라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하마구치의 필모를 통틀어서 가장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인간의 통념을 비틀어 인간과 자연 모두가 악한 성질을 내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작이 더 대단한 건, 여기서 관객의 시각을 한 번 더 비튼다는 점이다. 극중 뜬금없는 사운드가 귀를 자극하고, 혹은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다 이내 갑자기 끊긴다. 내러티브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고 거리감을 두라는 감독의 조언이다. 시점의 주인을 알 수 없는 숏도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시점의 주인에 대한 해답은 초월적인 존재밖에는 없는데, 바로 자연이다. 이 영화는 초월적인 시선으로 전개되며, 끊임없이 몰입하지 말라며 곳곳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즉, 어떤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우리는 극의 엔딩같이 일반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기현상도 바라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는 다시 영화의 내재적 주제와 연결되어 자연은 그 어떤 외세나 인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도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내용 또한 자연의 입장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그 초월의 시선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치 데이빗 린치의 작품과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미스테리함을 내내 풍기며 파편화된 서사가 분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허나 린치는 이를 관객들에게 전부 맡기며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고 우리를 복돋는데 반해, 하마구치는 자연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 시선에 토씨 하나도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고히 한다. 이제 그는 미스테리의 방향성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JE
4.5
스포일러가 있어요!!
양기연
4.5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단언하는 카메라가 여기 존재한다. . (스포일러) .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설명회 장면, 지역 주민들 측의 질문과 도시에서 내려온 사업체 측의 답변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때 카메라는 서로 마주보고 앉은 지역 주민 측과 도시 사업체 측 사이에 가상의 선을 둔 채 양측을 번갈아 돌아보는 방식으로 그 문답의 장면을 이어나가야 한다. 글램핑장 건설 사업을 두고 대립하는 양측 각각의 시선을, 카메라는 매번 반대편의 쪽에 서서 반대편의 시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번갈아 마주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역 주민 측의 질문을 들을 때에는 도시 사업체 측에 서서, 도시 사업체 측의 답을 들을 때에는 다시 지역 주민 측에 서서. . 그 씬에서 타쿠미는 말한다. 자신들도 결국에는 이 땅에서 모두 외지인이라고, 다만 균형이 중요한 것이라고. 마을 회장도 말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에서 흐르므로, 상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그 땅이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 자신이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도시 사업체 측과 일종의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자신도 결국 외지인의 입장에서 자연 그 자체와 일종의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 앞서 카메라가 설명회 씬에서 도시 사업체 측의 시선과 지역 주민 측의 시선을 각각 대신하여 상대측을 번갈아 바라보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카메라가 외지인과 현지인의 중간에 서서 각각의 시선을 번갈아 담지하려 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아가 타쿠미가 한 말에 입각하여 본다면, 타쿠미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 곧 다시 외지인으로서 자연 그 자체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 대립 관계에 있어서도 각각의 시선을 담지하려는 시도에 나선 바 있다. . 타쿠미가 땅 와사비를 발견하는 숏에서, 카메라는 현지인을 대표하는 자연물인 땅 와사비의 시선에서 타쿠미를 바라본다. 이후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나오는 숏에서, 카메라는 외지인을 대표하는 인공물인 자동차 후미의 시선에서 자동차 뒷편을 바라본다. . 이러한 시도는 퍽 대담해 보인다. 카메라가 그 중간에 서서 자연과 인간, 도시 주민과 지역 주민 그 각각의 시선을 대신하는 시도를 통해, 마치 그 양쪽 모두를 대변하는 매개가 될 수 있으리라는, 어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고 할까? . 사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타쿠미와 마을 회장 등 지역 주민들이 '균형'과 '책임'을 말할 때에도 드러나 보인다. 지역 주민들은 설명회 내내 도시 사업체 측에 어떤 기준들을 왜 사업체 측에서 자의적으로 정하느냐고 따진 바 있다. 그 연장선 상에서 그들이 균형과 책임을 언급할 때, 이는 마치 자신들 스스로도 자연을 상대로는 외지인의 입장이긴 하나 '균형'을 지키며 '책임감 있게' 자연을 대한다는 자부심 섞인 말처럼 들린다. . 그러나 타쿠미가 영화 초반부터 수번에 걸쳐 장작을 패 땔감으로 쓸 때, 땅 와사비의 시선 숏에 이어 타쿠미가 곧바로 그 땅 와사비를 꺾어버릴 때, 설명회 씬에서 지역 주민 중 한 명이 그 지역엔 건조한 바람이 불어 산불 위험이 크다고 언급하였음에도 타쿠미가 숲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과연 그 균형과 책임의 기준을 누가 정한 것인지 그 주민들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 사실 지역 주민과 도시 사업체, 자연과 인간까지 거창하게 나아갈 필요도 없이, 영화는 곳곳에서 단순한 개인 간의 소통조차도 쉽지 않음을 프레임을 빌어 보여주고 있다. . 도쿄로 돌아간 도시 사업체 측 직원들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회의를 하나,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마주보는 컨설턴트는 애초에 상황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귀찮은 듯 보인다. 화상 통화를 가능케 한 그 또 다른 카메라 렌즈는, 원거리에 떨어진 직원들과 컨설턴트 사이에 대화를 가능케 하는 수준의 매개는 가능하나, 온전한 소통을 보장할 수는 없다. . 그리고 화상 통화가 종료된 이후, 그들 직원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장과조차도 소통이 불능임을 인지하게 된다. 카메라는 화상 통화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직원들과 사장을 종종 한 프레임에 담곤 했으나, 그들의 소통이 불능함이 확실해진 순간 직원들과 사장을 별개의 숏으로 아예 분리한다. 심지어 그때 사장으로 하여금 자기 뒤 벽 액자 프레임에 붙어 있는 그림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도록 함으로써, 카메라는 관객에게 이중의 프레임을 인지케 하여 직원들과 사장간의 거리감을 한층 강화한다. . 사장의 지시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를 설득하려 내려오는 차 안에서, 그들의 대화는 종종 턱 막히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 프레임 안의 데이팅 어플 알림이 또 다른 프레임을 그리며 등장한다. 모두가 서로 간의 소통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매번 그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그 이중, 삼중의 프레임이 강조하고 있다(타카하시의 데이팅 어플 알림 프레임이 기능하는 방식은 사실 실패한 관계의 흔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타쿠미의 집에 놓인 액자 프레임이 기능하는 방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 한 명의 사람과 다른 한 명의 사람 간의 관계마저도 이처럼 어려울진대, 지역과 도시, 자연과 인간, 그 사이를 매개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가. 타쿠미는 자신이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지역 주민들 간의 매개가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자신이 자연과 인간 간의 균형을 말할 때 그것이 오만할 수 있다는 점에 둔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 역시 아내와의 관계에 실패하였고, 딸의 귀가 시간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소바 주인에게 고작 180엔의 에누리도 받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퉁명스럽게 대화를 주고 받는 등 소통에 썩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가. .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타쿠미에게 관리인 역할을 맡아 지역 주민들과 도시 사업체 사이의 매개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타쿠미가 이를 거절하자, 타카하시는 갑자기 장작 패기에 한 번 성공한 데 감동하여 자신이 그 관리인 역할을 하고 싶어졌다며 자신의 어드바이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타쿠미는 '사슴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면 글램핑장을 그냥 둬도 되는 것 아니냐'는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그러면 사슴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며,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시선을 담지한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다. 장작 패기 한 번에 도시와 지역 간의 매개가 되리란 희망을 품는 타카하시의 얼굴에서, 타쿠미는 과연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오만하게도 균형을 말했던 자신의 거울을 보았을까? . 그러나 카메라의 오만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 하나가 실종되고, 타쿠미, 타카하시, 마유즈미가 하나를 찾아 헤매던 중, 물가에 이른 타쿠미의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 숏에 이어, 피가 묻은 풀의 숏이 등장하고, 꿩 깃털 숏이 등장한다. 이는 다분히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죽음을 유추하게 만드는 숏의 연결이다. 그러다 바로 뒤이어 타쿠미가 '하나가 여긴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피는 사실 마유즈미의 피였음에 드러난다. 그렇게 하나의 죽음의 순간이 유보된다. 이제 카메라는 지역-도시, 자연-인간을 넘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기를 욕망한다. . 그 뒤 마침내 그들이 하나를 발견한 순간. 총에 맞은 사슴을 하나가 마주하고 있다. 하나의 시선에서 사슴을 바라보는 숏. 그 뒤 사슴의 몸 숏. 사슴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 사슴의 시선에서 하나를 바라보는 숏. 하나는 모자를 벗는다. 카메라는 이 순간에도 사슴과 하나 각각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 특히 사슴이 하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숏은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똑바로 바라보는 숏과 일맥상통한다. 하나가 영화 내내 무해해 보일 정도의 태도로 숲속을 돌아다녔어도 그는 자연 그 자체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과 같이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총을 빗맞은 사슴은 자연과 하나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하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감히 그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말했던 자신의 오만을, 타쿠미는 자신이 타카하시를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으로 하나를, 어쩌면 자신을 바라본 사슴의 눈에서 발견한다. 결국 타쿠미는 자신의 오만하고도 혐오스러운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어 보이는 거울인 타카하시를 살해할 수밖에, 아니 그렇게 자신의 분신을 죽여 자살할 수밖에 없다. . 타쿠미는 자신이 감히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으로 인해 딸을 잃는 파국에 이르렀다. 그렇게 타쿠미가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자신의 분신을 죽여 상징적인 자살에 이른 그 순간조차, 지역-도시, 자연-인간, 나아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길 욕망했던 카메라는 자신의 오만을 포기하지 못한다. .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떠나는 모습을, 카메라는 안개 잔뜩 낀 풍광을 배경으로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뒤 어디선가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프레임 좌측으로부터 타카하시가 등장하더니 몇 발짝 걷더니 다시 쓰러진다. 우린 이미 그 전에 타쿠미가 타카하시의 목을 졸라 타카하시가 거품을 문 모습을 보았다. 설사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차라리 카메라가 피 묻은 풀 숏 등으로 하나의 죽음을 유보했다가 기어이 다시 하나를 죽인 것처럼 타카하시를 한 번 되살려 그 죽음을 유보했다가 다시 죽임으로써, 또 한 번 생과 사의 매개 역할을 욕망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엔딩 숏은 오프닝 숏과 똑같은 앙각으로 숲의 나무들을 올려다 보는 트래킹 숏이다. 다만 오프닝 숏과 달리 이번에는 헐떡이는 남성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남성이 멈춰서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 카메라도 멈추더니, 영화가 끝난다. . 오프닝 숏에서 엔딩 숏과 단지 시간대만 다른 채로 똑같은 앙각의 똑같은 트래킹 숏이 등장한 뒤, 바로 다음 씬에서 하나가 숲속을 거닐며 나무들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 등장하였던 바 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프닝 숏의 시선이 어쩌면 하나의 시점 숏일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묻어난 핸드헬드 숏이 아닌 기계적으로 스무스한 트래킹 숏이기에, 그 시선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기계(카메라)임을 관객은 인지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자신이 하나의 시선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카메라임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이다. 즉, 카메라는 카메라 자신인 채로 하나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 그리고 엔딩 숏. 우리는 그 이전에 타쿠미가 죽은 하나를 안고 가는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엔딩 숏은 앙각으로 찍혀 있고, 엔딩 숏 내내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우리는 그 숨소리가 타쿠미의 숨소리이고, 그 앙각은 하나가 죽은 채 타쿠미에게 들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테니 그 시선을 담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이 숏은 오프닝 숏과 마찬가지로 트래킹 숏이다. 딸을 안고 뛰는 아버지의 거친 움직임이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린 분명히 하나가 눈을 감고 죽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자는 누구인가? . 오프닝 숏에서 이미 카메라는 카메라 자신인 채로 하나일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연장선 상에서 극 내내 지역과 도시, 자연과 인간, 생과 사조차도 자유로이 매개할 수 있다고 자신해 왔다. 하나는 자연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타쿠미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자신의 분신을 죽여 일종의 자살을 했다. 그리고 엔딩 숏에 이르러 카메라는 죽은 하나의 눈을 대신한 자신의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자살한 타쿠미의 숨을 대신한 자신의 눈으로 호흡한다.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목에만 '선과 악', '존재와 부존재', '긍정과 부정' 세 개의 대립각이 존재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모든 대립 관계를 매개 혹은 초월하여 그 모든 이분법상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던 오만 끝에, 유사한 오만을 지닌 극중 인물의 사망으로 오히려 새 생명을 얻어 숨쉬는 카메라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고 이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기보다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는 카메라가 여기 존재한다].
재원
5.0
어쩌면 자연은 꾸준히 경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거라고, 너희가 부른 비극인 거라고.
스테디셀러
4.0
세상 안의 악이 아니라 자연 안의 본능으로 바라보는 진기. 천천히 악셀을 밟아 자연을 그리다 힘껏 브레이크를 밟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풍경에 정확히 멈춰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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