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조규식

조규식

1 year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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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런치

영화 ・ 1991

평균 3.5

창작자의 지옥 같은 머릿속 탐구 리포트(특히, 글이라는 걸 써보겠다는 불쌍한 애송이들에게 부치는). 글이란 걸(픽션이건 논픽션이건) 제대로 써보겠다고 컴퓨터 자판기 앞이든 종이 앞이든 타자기 앞이든 앉아서 몇날며칠을 보내야 하는 지옥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다. 이는 지독한 스트레스로 그대로 돌아오는데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든다. 나 같은 경우는 끔찍한 불면증이 와서 알코올로 뇌의 셔터를 강제로 내리지 않으면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글은 안 써지고 검사는 받아야 하고 써놓은 것 꼬라지도 개판 엉망진창인데 날은 밝아오고 아침엔 다시 나가야 하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는 난해하다는 악명이 자자하지만, 사실 겪어본 사람 눈에는 불필요하게 친절하다. 윌리엄 S. 버로우스의 원작은 두 번 읽었음에도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지만(번역본인 것이 문제였을까? 아닐 것 같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물론 작품 내에서 파편화되고 원형에선 한없이 멀어진 형상의 상징들이 쏟아지는데, 이를 난해하지 않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 난해함을 풀기 위해 상징들을 본래의 대상(으로 추정되는 것)에 일대일 대응시키고 싶은 욕구도 마구마구 생겨날 테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아주 바라던 방향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는 창작의 고통에서 오는 지옥 같은 황홀경을 더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머릿속이 찢어지는 것 같아 고통을 잊기 위해 중독성 물질에 쩔어버려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끌고서 어떻게든 사건의 마침표를 마침내 찍는 바로 그 행위.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자체로 중독적이다. 탐정(혹은 형사, 혹은 영화 네이키드 런치의 주인공인 윌리엄 리)이 여기저기서 던져지는 사소한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으는 노고 끝에 마침내 전체의 퍼즐을 완성하여 전모를 알게 됐을 때의 경악. 그리고 창작자(여기서는 작가)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단 하나씩을 개고생하며 조합한 끝에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전율. 이 둘은 동일한 쾌감이며, 이렇기에 창작은 지옥 같지만 황홀하다. 아쉬운 점은, 크로넨버그 자신도 이 작품을 만들면서 난해하단 욕을 먹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지(물론 그는 저런 비난에 전혀 동의하진 않았겠지만), 난해함의 극단으로 치달을 때쯤마다 치명적인 윙크들을 친절하게 날려준다는 것이다.(친구들의 인터존 방문, 자루 속의 물건들, 조직원들의 본모습 등) 이 윙크들은 이중의 기능을 하는데, 지옥도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는 죄 없는 희생자들(=아무도 이딴 거 보라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손으로 찾아보고야 마는 딜레탕트 속성의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생명줄이기에 친절하고, 이와 동시에 지옥의 황홀경(이런 경험을 해봤던 자들의 머릿속에서 펼쳐질 트라우마성 플래시백)에서 경험자들을 강제로 깨어나게 만드는 약이기에 치명적이다. 나였다면 윙크들 모두 빼버리고 그냥 극한의 생지옥을 만들었을 텐데, 이는 사실 상업영화에선 택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니 크로넨버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타협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야 했음에도 주인공 윌리엄 리는 행운아다. 인터존에서의 무시무시한 경험에 가까스로 마침표를 찍고 떠나온 아넥시아로 와서도 또 똑같은 경험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아니 사실 어디에서건 마침표를 찍더라도 또 이동한 곳마다 매번 이런 지옥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 악몽 같은 운명(=창작)에 뛰어들었지만(그렇기에 윌리엄 리는 아내의 머리통에 또 총알을 박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어쨌든 그는 훌륭한 것을 계속 써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능 없는 불쌍한 애송이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그냥 크로넨버그가 보여주는 황홀한 악몽을 보며 전율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