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혁명

피델리티
평균 2.9
여성의 시각에서 성적 금기를 깬 혁명적 영화, 올해 러시아 영화들 중 가장 도발적인 작품, 욕망의 복잡한 본질을 탐구하는 용감한 시도, 스티브 맥퀸 감독 [셰임]의 여성 버전... [피델리티]에 쏟아진 해외의 찬사다. "발가벗은 욕망, 금지된 것을 탐하다" [피델리티] 포스터의 메인 카피다. . 과거 한 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제대로 만들어진 에로틱 감성 드라마를 오랜만에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을 안고 보았으나 위의 평가들과 광고 문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특히, [셰임]의 여성 버전이라는 평가는 그 말을 한 사람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 . 이 영화에 대한 본격적 비판을 하기 전에 몇 안되는 장점들을 언급하자면, 러닝타임이 82분으로 아주 짧아서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영화가 끝난다는 것, 장편영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에브게니야 그로모바의 연기력과 매력이 상당히 돋보인다는 것, 에로틱한 분위기의 묘사가 그래도 볼 만한 정도는 된다는 것. . 치명적 단점은 시나리오의 부실함. 얼마든지 긴장감을 유도할 수 있는 서사임에도 허술하기 그지없는 대사들과 인물들에 대한 단순한 심리 묘사는 주인공의 행동을 설득하기에 턱없이 모자르다. 욕망의 복잡한 본질을 탐구한다는 평과는 달리 영화에서 표현되는 레나의 욕망은 수시로 오락가락하는 듯 느껴진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지나친 의심과 집착에도 그리 동의하기 어렵다. 남편의 불륜에 대한 의심으로 흔들렸다기보단 오히려 남편의 불륜을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 남성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매력이 떨어지기에 레나의 성적 일탈도 그리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면 비난을 받았을 지점들도 꽤 눈에 띈다. . 결말에 대한 선택에서도 감독은 갈팡질팡한다. 아내의 일탈을 알게된 후 부부가 나누는 대화는 하품이 나올 정도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으로 돌아가는 화해도 뜬금없으며 그 화해를 무산시키는 듯한 엔딩은 여운보다는 배신감을 남긴다. .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독을 택한, 그러나 그 중독으로 인해 더 큰 고독에 함몰되는, 영화 [셰임]의 자기파멸적 악순환의 허무, 영화의 오프닝부터 스크린을 휘감는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한 여성의 흔들리는 욕망과 그 남편의 일렁이는 질투를 교차시키는, 영화 [언페이스풀]의 우아한 비극, 모든 것을 다 걸었기에 모든 것을 다 잃는, 영화 [인간중독]의 극단적 몰입... 이런 미덕들이 이 영화엔 없다. . JTBC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매주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장르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건질만 한 영화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리뷰의 마지막에 어느 시점부터 영화는 사랑이란 주제를 TV에게 완전히 내어준 것 같다고 썼는데, 이제 에로틱 드라마 장르까지 TV에게 빼앗긴다면 이제 스크린엔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히어로들과 빌런들, 자기복제에 여념이 없는 형사물과 조폭물, 몇 번씩 우려먹어 뼈의 원형조차 사라질 지경인 각종 시리즈의 리부트들만 남을 것 같아 답답하고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