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3 years ago

3.0


content

환승연애 2

시리즈 ・ 2022

평균 4.0

이 프로그램의 난폭한 설정에 내가 하릴없이 수긍하게 된 건 현규가 울었을 때였다. 자신이 못난 모습이었을 때 만났던 연인에게, 그리고 못났던 과거의 스스로에게 유감을 표하는 눈물이었다.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고.."라며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 말은 나언이만 들어도 되었을 건데, 카메라가 돌아가는 이상 수만 명의 시청자를 염두에 둔 독백이 되어버린다. 어떤 눈물은 수만 명 앞에서 내보일 각오가 되었다는 것이 곧 진심을 의미한다. 고 나는 믿는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심하게 슬퍼하기. 이건 꽤나 세상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인데, 그 당연한 사실을 너무 슬퍼했다간 멍청해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멱살 잡지도 못할 시간 따위를 원망해서 뭐하겠나. 그 위험을 무릅쓰고 프로그램 내내 눈물지은 해은이한테 보너스 출연료를 줘야 한다. 원빈이 출연료 때문에 나왔다고,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고백하는 순간에 이 프로그램이 약간의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말하는 원빈이 전 연인에게 허덕이는 장면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제작진이 출연진에게 "갑자기 샘솟는 미련이 너무 머쓱할 것 같으면 그냥 돈 때문에 나왔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두둑히 챙겨줄게," 라며 도와주는 게 아닌가. 시치미 뗄 수 있도록. 출연진은 제각기 목적이 달랐겠지만, 그중에 돈을 언급한 사람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위해 나온 것 같으니 우리 모두 놀림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만우절날 고백하는 사람치고 진심 아닌 사람이 없다더라.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잘 잊고 잘 살고 있었다." 라며 스스로의 마음에 놀란 인간들을 보면서 역시 서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 사람을 보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얼굴과 몸을. 미소와 눈빛과 등짝과 손목을 마주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손톱만큼의 미련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서 거기에 물을 주어 무럭무럭 키워나가기로 한 두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도 보너스 출연료를 주면 좋을 것 같다. 며칠 전에 막내동생이 여자친구한테서 받아 온 꽃다발을 꽃병에도 안 꽂아두고 식탁 위에 이틀이 지나도록 방치해두길래 내가 화를 냈다. 그게 왜 그렇게 화나던지. “다른 사람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라고까지 할 뻔했는데, 한밤중에 속옷만 입고 땅콩 잼을 무한히 퍼먹다가 급발진하는 내 모습이 총체적으로 우스워서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선 친구들이 카톡방에서 환승연애 얘기를 하길래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고, 그랬더라면 너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지 생각했다. 나는 너무 나라서 어차피 얼굴을 본다고 해도, 같은 집에 갇혀서 몇 주를 같이 산다고 해도, 강제로 "X와의 데이트"에 끌려간다고 해도, 중요한 말은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그러다가 오히려 전국민이 지켜보는 거라면 진심을 좀 꺼내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시간을 때우느라 이런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 중에 누군가는 내 마음에 공감해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