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양태현

양태현

9 month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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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간

영화 ・ 2003

평균 3.5

하네케의 세계는 원인이 부재한 세계이다. <퍼니 게임>에서 자택을 침입한 두 악당이 게오르그 가족을 그토록 끔찍하게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히든>에서 익명의 범인이 협박성 도촬 비디오를 조르쥬에게 지속적으로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늑대의 시간>은 이러한 세계의 정점이다. 극 중 등장인물에게 닥치는 상황, 벌어시는 사건, 심지어 등장인물의 행동마저 이 영화에서는 아무런 원인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오직 결과만을 담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쇼트는 맥거핀이다. 이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물의 시선으로 본다면, 하네케는 영화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감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 원인의 부재는 이유 없는 기적으로 탈바꿈한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려고 하는 아이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구해야 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논리에서 비롯된 자그마한 기적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네케는 믿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황량한 풍경에서 정지해 있던 열차는 광활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전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