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평일 아침에나 볼 법한 막장드라마의 얼개부터 이미 재밌지만, 무언가 결핍된 인물들의 자해적인 방황이 가장 흥미롭다. 아들 혹은 남자로서의 인정투쟁처럼도 보이는 카일의 알코올 중독, 못 이룬 애정에 대한 결핍으로 가득한 메릴리의 색정증. 권총과 남자, 그들 주변에 즐비한 거대한 유정까지, 프로이트적인 상징들도 넘친다. 그렇지만 굳이 그에 대한 분석이 아니더라도, 영화의 묘사나 막장 소재가 주는 자극 이상으로 어딘가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느껴진다. 이를테면 후반부 계단에서 쓰러지는 해들리 남매의 아버지와 미친듯이 춤추는 메릴리의 교차 편집. 애당초 프롤로그에서부터 비극적인 결말을 말하고 있지만, 인물들이 등장하고 소개되는 초반부마저도 묘한 불협화음과 심리적인 균열로 가득하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미치와 카일 사이에 순수한 우정만 있을까. 키스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카일과 루시의 만남 속에 낭만이란 게 있긴 했을까. 카일에 대한 루시의 호감도, 낭만적인 감성이라기보단 호기심이 결부된, 가지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불길하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이끌림처럼도 읽힌다. 그러고 보면, 언뜻 올곧은 미치와 루시가 주인공일 법도 한데, 영화는 카일과 메릴리를 더 부각한다. 일종의 악역이 더 눈길을 끄는 점이야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날 드라마와 비교터라도 제법 전복적이지 않나 싶다. 물론 미치와 루시도 마냥 투명해 보이는 건 또 아니다. 넌지시 비치는 계급적 간극이나 앞서 말한 루시에게서 비치는 묘한 감정 탓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선한 주인공' 역할에 머문다기보단,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열등감 안에 분열적인 내면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폭발하고 만 해들리 남매에 비해, 두 사람은 끝까지 분열을 잠재한 채 살아갈 듯해 (불완전한 해피 엔딩이)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마치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유전. 어쩌면 미치는 루시를 사랑한 것 자체가, 루시는 (그녀의 대사처럼) 뒤엉킨 관계의 "회전목마에서 내리지" 않은 것이 그들 방식의 자해적인 방황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재벌 가문의 파멸을 그리면서 일종의 자본 비판적인 기능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에 앞서 파국적인 네 인물들의 (역설적이게도) 조화로운 불협화음이 인상적이다. 계급적인 맥락에서라면, 아마 뜻하지 않게, 평범한 중산층의 일상적이고 심리적인 불안까지 예기하는 듯한 엔딩까지도. 특히 테크니 컬러와 인공적인 세트가 '극'의 감각을 더 강렬히 꾸미는 덕택에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 같기도 한 <바람에 쓴 편지>는 정말 통속적이지만 기이한 멜로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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