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유해조

유해조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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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영화 ・ 2022

평균 3.2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는 미국식 낙관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재난과 사고는 폭력인가? 아니다. 재난과 사고를 미디어로 다룸으로써 그것들을 완벽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낙관주의이며 미국의 자신감이다. 허나 사고는 실제로 발생하고야 만다. 단순히 한 트럭이 기차를 들이박아 생긴 사고는 검은 연기로 번져 나간다. 즉 매캐한 유해물질은 낙관주의의 실패이자, 제도에 대한 믿음의 배신이자, 그로 발생한 죽음이다. 잭과 그의 동료의 강의에서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는 동일시된다. 그러니까 미국이 만들어낸 휘황찬란한 자본주의와 거대 미디어 산업은 나치의 제국주의적 횡포와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고찰이다. 요컨대 미국의 자신감은 때로 실패를 맞이하고 국가적 재난에 맞서 국민들은 줄지어 군중을 이루는 수밖에 없다. 다른 길로의 일탈을 시도했던 잭과 그의 가족들은 다시금 군중의 대열에 합류하고 만다. 재앙은 이내 사라진다. 그러나 후유증은 지속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 한번 목도해버린 재앙은 그것을 겪은 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긴다. 제2차 세계대전, 혹은 9/11. 일본의 경우에는 동일본대지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6.25 혹은 독재정권의 탄압 등이겠고, 가장 비근한 예로는 코로나19도 마찬가지이겠다. 여하튼 재앙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미국인들의, 어쩌면 전세계 사람들의 고질적인 신경증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 어떠한 알약을 탐하여 몸과 정신을 내어주기도, 살인을 계획하기도 할 정도로 그들은 혹은 우리는 유약하다. 영화에서 히틀러는 죽음을 죽이는 자로 묘사된다. 같은 대사를 읊으며 라스 에이딘거에게 총을 쏘는 잭의 뒤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잭은 곧 엘비스이며 히틀러인 셈이다. 누구든 죽이는 자가 될 수 있고, 누구는 죽는 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내가 혹은 다른 이가 히틀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일지도 모르겠다. 아메리칸 드림과 자유주의의 허상은 제국주의의 그것과 다를바 없을 지도 모르겠다. 허나 수녀의 말했다시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수녀들이 있기에 체제가 유지되는 것처럼, 누군가는 미국이라는 체제를 믿어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재앙이 지나간 후 남은 것들로부터 희망을 찾아야하며, 헛된 희망이야말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힘이며, 미국의 오만함을 낱낱이 드러내며 희망의 동력을 발굴하게끔 하는 재앙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 자체로 백색소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