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드덕

황후 엘리자베트 시즌 1
평균 3.4
[시청 전 기대평] 뮤덕은 아니지만 유명한 뮤지컬 넘버를 즐겨 듣는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도 그중 하나다. 넷플릭스 공개 예정작들을 쭉 훑어보다가 <황후 엘리자베트>가 바로 눈에 들어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예고편에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란 대사가 나오는데 읽자마자 '나는 나만의 것'의 가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검색해봤는데 정보가 너무 없음. 아마 뮤지컬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원제는 Die Kaiserin으로 매우 직관적이다. 카이저가 황제인 건 알았는데 카이저린이라는 단어는 처음 알았다. 영제로는 The Empress, 즉 황후다. 예전부터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시씨 3부작을 꼭 보고 싶었는데 어떤 OTT에서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음.ㅜㅜ 그러던 찰나에 넷플릭스에 황후 엘리자베트의 삶을 다룬 시리즈가 나와서 반갑게 느껴진다. 부디 재미있길!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실제 역사 이야기※ [엘리자베트의 남편은 어떤 인물이었나?] 시씨(Sissi)란 애칭을 가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설명할 때 꼭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오스트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황후. 그녀는 영국의 다이애나비처럼 죽어서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기억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유럽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황실, 신성로마제국이 다 이쪽 집안 이야기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의 해체 요구에 의해 16개 연방이 탈퇴하면서 1806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때 남은 합스부르크의 영토로 오스트리아 제국만은 유지하는데, 오스트리아는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한다. 기회를 엿보던 헝가리가 그 일을 계기로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1867년 헝가리 왕국과의 대타협으로 탄생한 게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헝가리 왕국의 왕도 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나라가 서로 다른 독립된 국가임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18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재위 기간만 68년(1848~1916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건설과 1차 세계대전이 전부 그가 황제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숙부인 페르디난트 1세 황제와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어렸을 때부터 차기 황제로서 교육을 받았다. 아들의 황위 계승 자격을 주장 및 확보하고 제왕학 교육을 주도했던 게 어머니 조피 대공비였다. 그렇게 손수 아들을 차기 황제로 만들었으니 웬만한 며느리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결혼 전 생애] 엘리자베트는 18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바이에른 왕국(=바바리아)의 공주 루도비카와 바이에른에서 유일한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요제프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럽의 왕실로 시집 간 자매들과는 달리 루도비카 공주가 자국의 귀족과 결혼하면서 엘리자베트는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여러 정부와 사생아들을 둔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탓에 유럽의 다른 왕족, 심지어는 귀족들과 비교해도 독특한 양육 방식을 취했다. 덕분에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따분한 공부 대신 뮌헨의 저택과 포센호펜 여름 별장에서 승마, 수영을 하며 뛰어다니는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피 대공비는 원래는 엘리자베트의 언니 헬레네를 아들의 신붓감으로 일찌감치 점찍어뒀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당시 15세였던 엘리자베트에게 반해서 맞선을 깨고 청혼하게 된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854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 동화 같은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엘리자베트는 일기에 '누가 나를 뻐꾸기로 위장해서 낯선 둥지에 두었나'라고 쓸 만큼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느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다는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궁정에 시집간 엘리자베트는 쇤부른 궁전의 숨 막히는 궁중예절과 시어머니의 간섭에 적응하지 못했다. 조피 대공비는 며느리와 마찰이 잦았는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조피가 루도비카 공주의 언니, 즉 엘리자베트의 이모라는 사실이다. 며느리이기 이전에 친조카인 그녀를 그렇게 쥐잡듯이 잡은 것이다. 결혼 생활 내내 고부갈등이 심했는데 시어머니로 인해 엘리자베트는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직접 양육하지도 못했다. 분명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오로지 국정에만 매달렸던 일곱 살 연상의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불화에서 엘리자베트를 지켜주지 않았다. 내리 딸만 낳았다고 압박도 받았는데 1858년 아들 루돌프를 출산한 뒤에야 그녀는 시집살이와 속박에서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첫째 딸 조피가 병으로 유아기에 사망하면서 시름에 잠긴 그녀는 남은 자식들, 시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기셀라와 루돌프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큰딸 이름이 조피였던 것도 시어머니가 마음대로 본인 이름을 붙여준 것이었다. 루돌프를 낳음으로써 황실의 후사를 잇는 책임을 다하고 나자 엘리자베트는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1868년에 태어난 막내딸 마리는 손수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4명의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기른 막내를 가장 사랑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했고, 황실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 여행을 다녔다. 폐 질환 등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주치의로부터 요양을 권유받기도 했다. 엘리자베트는 심지어 결혼 생활의 짐을 덜고 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자 남편이 정부를 두는 것을 묵인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과 최후] 그녀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할머니 조피의 엄한 후계자 교육, 어머니의 방임, 아버지와의 숱한 정치적 갈등으로 괴로운 삶을 살았다. 루돌프는 결국 30세가 된 1889년, 마이얼링 별장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뒤늦은 후회와 죄책감으로 슬퍼했으며 죽을 때까지 검은 옷만 입었다고 한다. 비극은 연이어 이어졌다. 아들이 죽기 1년 전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뒤로는 언니 헬레네 (1890), 헝가리의 외무장관이자 염문설이 있었을 정도로 가까웠던 친구 안드라시 백작(1890), 어머니(1892), 여동생(1897)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사망으로부터 9년 뒤인 1898년, 엘리자베트는 스위스 여행 중 아나키스트에 의해 60세의 나이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 루돌프의 죽음으로 황태자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공식 계승자가 된다. 1914년 6월 28일, 아내와 함께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그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이것이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다. 엘리자베트를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따지면 마지막 황후는 아니다. 다만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임이었던 카를 1세는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보위에 올랐고 재위 기간이 2년도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제국의 최후라는 상징성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부부에게 부여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