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할리우드에서 글 쓰는 작가의 아이러니 * LA안 작은 호텔, 네 개의 벽에 둘러싸인 작가 바톤 핑크는 액자 안 여성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다본다. ..... <바톤 핑크>는 창작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루는 영화이다. 극작가 바톤 핑크는 뉴욕에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연극을 만들어 성공한, 신념이 아주 강한 작가이다. 그는 또 다른 연극을 만들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할리우드의 섭외 제의를 받아들인다. LA, 할리우드에 도착한 그는 작은 호텔의 방에 들어간다. 핑크는 호텔 로비에서부터 무언가 간극을 느낀다. 로비의 직원은 벨이 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지하실에서 계단을 열며 등장한다. 그는 자기이름 ‘채트’를 수차례 강조한다. 반면, 엘리베이터의 직원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호텔에 들어서고부터 지나치게 시끄럽거나 지나치게 조용한 순간이 반복된다. 핑크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감을 못 잡고 있다. 배정받은 호텔의 환경은 열악하다. 덥고 습기가 차있으며, 모기까지 날아다닌다. 벽지는 자꾸 흘러내리려 하고, 이상한 접착제까지 흐르고 있다. 방음도 안 돼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옆방의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단적으로 말해 창작을 할 환경이 못 된다. 핑크는 할리우드의 반짝임에 이끌려 왔지만, 정작 그는 글을 시작할 환경조차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핑크를 섭외한 영화사, 캐피톨 사의 사장 잭의 별장은 으리으리하다. 하지만 잭의 별장 역시 핑크의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호텔의 방과 다를 바 없다. 잭은 평생 레슬링을 보지도 않은 핑크에게 레슬링 영화 각본을 짜올 것을 부탁한다. 여자와 고아 둘 중 한 가지 소재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며, 핑크의 방식과 반대되는 정형화된 극본을 요구한다. 연극에서의 유명세로 섭외되어 B무비의 각본을 쓴 다는 것부터가 하나의 아이러니로, 작가와 할리우드의 갈등을 예고한다. 호텔과 영화사장의 집이 유사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둘 다 창작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지만, 둘 다 작가의 창작 활동을 방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핑크는 틀에 박힌 창작을 강요받으면서, 호텔의 방에서 소득 없는 사념에 젖는 일을 전전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핑크의 집중은 하얀 벽지의 한 가운데, 검은 타자기의 표면 그리고 액자 속 그림의 여자 뒷모습 같은 불특정한 지점에 불시착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창작이 막힌 창작자가 겪어야 하는 영원과도 같은 정적을 잘 포착해낸다. 그러던 중, 핑크는 LA에서 의지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저명한 작가 빌 메이휴와 그의 비서 오드리 테일러, 그리고 옆방의 보험사 직원 찰리가 그들이다. 빌 메이휴와 오드리 테일러는 할리우드 선배로서 핑크에게 조언을 해주고, 찰리는 이웃으로서 핑크의 푸념을 들어준다. 핑크는 할리우드의 쟁쟁한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보통 사람인 찰리와의 대화가 맘에 든다. 그는 보통 사람에 대해 다룬 핑크의 작품 세계를 일부 대변해 주는 듯하다. (스포일러) 그러나 찰리는 나중에 커다란 배신을 하게 된다. 그는 보험사 직원도 보통 사람도 아닌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었다. LA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에 핑크는 커다란 배신감을 받는다. 그를 자신의 신념에 맞는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핑크의 내면은 부서진다. 핑크는 오드리가 빌 메이휴의 작품을 써주었다는 할리우드의 비밀을 깨닫고, 그녀로부터 작품의 조언을 들은 참이었다. 그녀와 좀 더 만났더라면 핑크는 이상적인 작품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핑크와 정사를 나누고, 다음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정황상 범인은 분명 찰스일 것이다. 할리우드에 맞는 작품을 쓸 기회를 잃은 핑크는 자기만의 세계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귀를 틀어막고, 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작품만을 쓰기 시작한다. 작품을 다 쓴 핑크는 ‘이것은 걸작이다’라고 확신한다. 그는 해군들의 출항 파티에 참여해 춤을 춘다.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에,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해군들은 누구도 자신을 작가라고 주장하는 남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한편, 전에 잭의 별장과 호텔이 유사하다고 했다. 이 둘은 창작의 보금자리이지만, 창작을 저해하기도 하는 할리우드의 상징이다. 그리고 잭과 찰스는 각각의 공간의 화신이자, 크게 보면 할리우드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잭은 글도 읽지 못하지만 그 돈쓰는 재주로 영화사 사장이 되었다. 작가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서, 바닥을 모르는 아첨으로 부담감을 준다. 그는 흥행에 필요한 작가들을 여럿 거느리며, 작가들을 한 번 쓰고 버리는 총알처럼 이용한다. 잭이 제안한 소재, 여자와 고아 중에서 고아는 아마 가족이 없는 찰스를 의미할 것이다. 할리우드의 주된 소재 중에 하나를 도맡는 그 역시 핑크를 괴롭히는 인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자를 상징하는 것은 오드리이었지 않았나 싶다. 저 제안에 정답이 있다면 분명 여자일 것이다.). 호텔의 접착제처럼 귀에서 고름이 흐르는 그는 핑크가 오드리와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핑크를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해 창작을 방해한다. 또 경찰을 죽이면서 찰스가 말하는 ‘하일 히틀러’란 대사는, 찰스와 유대인 핑크의 갈등이 운명적이란 것을 보여준다. 잭과 찰리는 둘 다 고단수이다. 핑크에게 직접 공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압박을 가한다. 잭은 핑크의 자기 세계에 빠진 작품이 맘에 들어 채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계약을 내세워 그를 할리우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핑크의 지인을 해고해서 그에게 압박을 가한다. 찰스는 핑크 본인이 아닌 오드리와 친척을 살해함으로써 압박을 가한다. 아직 할리우드 초보인 핑크는 이 둘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는 작가에게 할리우드를 배우도록 강요를 하고, 작가는 귀를 틀어막는다. 둘은 반드시 결탁해야 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핑크는 오드리를 통해 할리우드와 소통하고 작품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찰스에게 살해당했다. 찰스가 준 상자에는 아마도 오드리의 목이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핑크가 바라던 정신적 활동의 원천이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어쩌면 그 상자는 잃어버린 핑크의 감성이나 창작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핑크의 감성이란 것이 무엇일까. 영화사 사장은 자신이 거느리는 20명의 작가들이 핑크 감성은 얼마든지 생산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감성이 정말 나의 것인가? 찰스가 준 이 상자는 나의 것인가? 작가 핑크는 자기 감성이 길가의 돌맹이 같은 것이라는 회의감에 빠졌다. 그는 상자 안의 얼굴을 보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항상 여성의 뒷모습뿐이다. 그 뒷모습은 마치 <차이나타운>에서 잭 니콜슨이 들었던 것처럼, 여기가 할리우드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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