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곧 사라질 비밀 같은 이야기
이 책은 토종씨앗과, 씨앗으로 차린 밥상을 지켜 온 아홉 할머니들의 비밀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우리의 씨앗과 할머니들을 서서히 망각해 왔다. 토종씨앗과 할머니의 지식과 경험은 돈이 되지 않는 낡고 쓸모없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곧 사라질 비밀이었다.
할머니의 비밀을 밝혀야 했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했다. 올해로 방년 79세. 이 책에 나오는 아홉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1세라는데, 마음이 다급해졌다.
글을 쓴 김신효정과 할머니들의 삶을 사진에 담은 문준희 작가는 씨앗에 담겨 있는 할머니들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지난 3년간 강원도와 경상도, 남도와 제주도를 쏘다녔다. 맛집과 카페 없인 못 살 거 같은 그녀들이 할머니들이 지켜 온 씨앗과 밥상, 그리고 억척같았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숨이 멎을 때까지 씨앗도 호미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수십 년간 쌓아 온 농사의 기술과 씨앗의 지혜, 밥상의 노하우는 비밀에 부쳐져 왔다. 이제는 할머니의 손과 몸으로 기억해 온 삶의 보고를 밝혀야만 한다. 씨앗과 밥상에 담긴 할머니의 비밀에 귀 기울일 때가 왔다. 이제는 역사가 될 할머니들의 삶으로부터 미래를 찾아야 한다. (9~10쪽)
씨앗, 밥상의 근원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토종씨앗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할머니라는 비밀’이었다. 씨앗이 씨앗을 맺는 그 억겁의 시간 속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의 손에서 손으로 씨앗이 지켜져 왔다. 할머니는 새나 쥐가 씨앗을 파먹지 않게, 장마철 씨앗이 썩지 않게 집안 구석구석 씨앗을 숨겨 두었다. 씨앗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졌다.
씨앗은 할머니의 손에서 밥이 되고 국이 되고 반찬이 되어 왔다. 할머니의 씨앗은 철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밥상으로 변신해 왔다. 씨앗은 할머니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할머니들은 식민지배와 전쟁 속에서도 씨앗을 지켜 냈다. 밥상도 농사도, 삶의 기쁨과 슬픔도 모두 씨앗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짓밟힐 수 있고 꺾어져 버릴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매서운 비바람을 막아 주었다. 할머니들은 바로 그 ‘누군가’였다. 묵묵히 씨앗과 밥상을 지키며 가족을 부양하고, 이웃과 마을을 돌보았다. 그것이 바로 할머니들의 비밀이다. 그것이 작고 작은 씨앗일지라도,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언제나 마음을 기울인다. 할머니가 기울여 준 마음 덕에 오늘도 할머니의 손에서는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난다. (257쪽)
할머니들의 ‘살아 낸 힘’
손녀딸 같은 저자들이 만난 아홉 할머니들은 온갖 차별과 가부장제의 핍박 아래 호미 하나로 생명을 일구어 온 여성 농민이다. 그녀들은 굴곡진 시간 속에서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소화해 낸 존재들이었다. 저자는 할머니들이 지켜 온 토종밥상을 만나면서 ‘풍요와 행복의 레시피’를 찾을 수 있었다.
씨앗이 있고 땅이 있으니까 짓게 된다는 토종 농사를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한다는 할머니를 만나면서 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는 호기심과 경외심이 들었다. 부족한 문장으로는 할머니의 힘을 온전히 전하기 어려워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저항하지 못하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절망의 시대에 낙담치 말자. 견디다 보니 살아지더라는 ‘할머니의 힘’을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다.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다 보니 살아지는 시간, 그 시간을 꼬닥지게 걸어가다 보면 이토록 깜깜한 터널의 끝에서 한줄기 빛이 보이지 않을까. 넘어지고 부서지더라도, 걸을 힘이 없어 웅크려 앉아 있더라도 괜찮다. 부디 함께 살자. 할머니가 차려 준 땅과 하늘의 기운 가득한 토종밥상 한 그릇 푹푹 떠먹고 함께 살아 내자. (146쪽)
이 책은 돈으로만 환산되는 세상 속에서 비밀에 부쳐져 온 여성의 지식과 노동, 삶의 지혜들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다. 여성 농민들이 견뎌 온 일상의 고단함과 지독한 통증이 아로새겨져 있다. 밥숟가락에서 시작되는 할머니들의 우주가 포개어져 있다.
씨앗에 숨겨진 비밀 같았던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이제 세상과 만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