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가 발견한 편지?
우리 시대의 양심이자 진보적 지성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 )의 신작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From A to X: A Story in Letters)』은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 2008년 수상 후보작(longlist)에 오른 작품으로, 출간 직후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소설은 편지와 인용, 메모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두에서 존 버거 자신이 직접 등장해 이 편지와 메모들을 어느 폐쇄된 교도소에서 발견했음을 밝히고 있어, 기존에 나온 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시작한다. 즉 약제사인 아이다(A ida)가 반정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힌 자신의 연인인 사비에르(Xavier)에게 쓴 편지와 그 편지 뒤에 적힌 그의 메모로 이뤄진 이야기다.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구로, 가자 지구에 달려가 아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미술학교를 열고, 작년말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으로 천삼백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작가 존 버거, 그는 현실사회의 문제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서도 두 남녀가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독자의 현실로 가져와 함께 고민해 보자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헌사에는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창립 멤버이자 난민 캠프의 교사이기도 했던 가산 카나파니(1936-1972)는 자신이 타고 있던 차가 폭파되어 죽었고, 이 죽음은 이스라엘 정보기구 모사드에 의한 암살이었으나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지고 말았다. 이 작가에게 바친 헌사를 통해 우리는 사비에르의 모델이 혹시나 카나파니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사랑과 투쟁의 일상, 그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어
소설의 주인공인 사비에르와 아이다,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폭압적 현실에 맞서 자신들의 일상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발견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이다는 약제사로서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듣고 어루만지면서,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서 듣는 바깥의 소식을 통해 또는 기억을 통해 이 세계의 불평등과 세계화,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지닌 폭력성에 대해 잊지 않고 되새기기 위해 메모를 한다. 그에게 부과된 이중종신형이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았던 나이만큼 그 시신을 감금해 놓는다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런 데다 두 사람은 결혼한 사이가 아니므로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아이다는 자신의 일상에서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과 위협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변사람들의 소식을 따스한 어조로 편지를 써 보낸다. 쓰러지기 직전의 당뇨병 환자가 약국 문을 두드린 날 결국 그의 목숨을 살린 게 설탕 한 덩어리였음을 이야기하는 편지,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외출해 지프를 탄 '그들'로부터 총에 맞은 소년을 약국에 데려와 살려냈다는 이야기, 블랙베리 덤불에서 열매를 따던 날 그에게 이 맛과 향과 색을 전해 주고 싶다며 열매를 막 따려고 하는 자신의 손 그림을 그려 넣은 편지, 집이 폭격당한 이웃 앞에서 진정제로 쓰이는 쥐오줌풀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반사적인 직업 정신에 대한 무력감을 토로한 편지 등,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글 모두는 서로의 부재를 견디고 현재에 맞서 당당히 그들의 일상을 나누고자 하는 치열하지만 절제된 몸부림이다. 또한 아이다의 편지 뒷장에 적어 내려간 사비에르의 메모 속에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인물들―프란츠 파농, 마르코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에 관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감옥에서마저 현실에 대한 혁명과 저항의 내밀한 투쟁을 계속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폭압적 현실에 띄우는 절박한 안부들
소설 속에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 단일시장 체제로 흡수돼 가는 전 세계의 불평등과 폭력, 정치적 종교적 갈등과 내분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오늘날의 현실, 이 세계가 바로 두 남녀의 일상이자 현실이다. 아이다는 사비에르를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어, 터키어, 아랍어 ―미 구아포, 미 소플레테, 미 골론드리노, 하야티, 카나딤, 하비비― 등 여러 국적의 애칭을 쓴 것도, 비단 지구 반대편 어느 도시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라는 구체성을 상기시키고 어딘가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랑을 되살리기 위한 존 버거의 애틋한 호명이 아닐까. 198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는 '인간의 진정한 적은 일반화다'라고 했다. 탱크와 지프, 험비, 우지 기관총, 헬리콥터, F16 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들'의 위협적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아이다의 말을 우리는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들'을 일반화시켜 특정한 지역의 특수한 상황, 특정한 적으로 대상화하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일반화가 지닌 폭력성과 함정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적은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비양심, 무력감, 눈가림, 외면에서 오는 세계와 대상에 대한 거리 두기에서부터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현실이 오늘날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일깨우기 위해, 작가는 실존인물들과 지명들을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또한 이 편지들을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에 따르되 보내지 않은 아이다의 편지를 적절한 곳에 임의로 삽입해 놓았음을 밝히면서, 작가는 어쩌면 독자들이 이 편지의 사이사이, 이들의 절박한 현실의 사이사이를 함께 메워 주기를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하나하나의 편지와 메모는 소통에 대한 애틋한 갈망이자, 내면의 볼륨을 높이고 외치는 투쟁의 목소리이자, 사소한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발견이다.
존 버거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문학의 집으로 들어가는 몇 가지 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권위있고 공적인 목적을 위한 정문, 그보다는 소박하고 개인적인 용도를 위한 옆문, 그리고 부엌으로 난, 소란스럽고 사소한 드나듦이 있는 뒷문, 이 세 가지 중 마지막이 바로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자신이 이용한 문이라고 그는 비유했다. 이 문 앞에서 오고 간 작은 이야기들을 읽는 우리는, 어느새 그들의 식탁에 앉아 닫혀 있던 귀와 침묵하던 입을 조금씩 열고, 무기력과 고독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모
3.5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조권형
3.5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희망도 기대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고 그만큼 현대인은 불행해지고 있다. 문제는 믿음이다.
진리
4.0
미 구아포, 야 누르, 하비비, 카멜레온, 카나딤, 하야티, 미 소플레테. - 그 안대는 얼마 동안 대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물었어요. 금을 찾을 때까지요! 당신이 말했어요. 그런 다음, 미소를 띤 채,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며 당신은 안대를 벗었어요. 이 이야기 마음에 들어요? p. 34 - 이미 이별이, 버릇없는 원숭이처럼, 창가에 매달려 있네… p. 51 -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p. 92 - 당신이 네 개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비누 열두 개를 보내요. p. 114 - 그녀가 상처를 보여줬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둘—그녀와 상처—은 서로를 불편하게 하며 지냈던 거죠. p. 114
anjo
5.0
죽음 앞에서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전합니다. Te quiero, Mi Guapo. ㅡ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
영화부족민
4.5
수없이 아름다운 것들, 그것을 보는 현상학적인 서술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의 미학이란 이런 것. 가장 현대적으로 뛰어난 연애소설 중 한 편이다.
Uncle Roh
4.0
미 구아포 (Mi Guapo) 그건 하늘 처럼 파란색이 아니라 분명 잘 익은 자두의 파란색이었어요. 그 파란색을 오늘밤 어둠 속에서 편지에 담아 감방에 있는 당신께 보냅니다. 22p Habibi (하비비) 액정에 뜬 당신의 문자 메시지가 하늘보다 더 밝게 빛나네요. 25p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27p. 카나딤 (Kanadim) 미 구아포, 미 소플레테, 나의 카나딤, 야 누르, Mi soplete "나의 횃불' 이란 뜻의 스페인어 부재가 無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無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115p
팜므파탈캣💜
3.0
혼자가 아니기 위해, 내 안에 수많은 이름을 담아 당신에게 보냅니다. A to X.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 생각났다. 다른 점이라면 아름답지만 너무 판타지라 오히려 아름답기 어렵다는 것. 250616 (2.6) - 1.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잊히는 것과 영원한 것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은 틀렸어요. 영원한 것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옳아요. 영원한 것은, 독방에 갇힌 당신과, 여기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당신에게 피스타치오와 초콜릿을 보내는 나를 필요로 하죠. 당신 발이 어떤지 알려 줘요. 나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2. “베드”. 열심히 일하는 이웃 노인. 아내와 사별하고 다섯 아이들과 매주 통화. 글은 모르지만 지혜는 알아 3. “아마”. 19살 다정한 이웃 소녀. 10살 연상의 전기 기술자, 컴퓨터 박사 "라미"와 연애했는데 그가 자다가 경비대에 잡혀가 살해당함.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를 낳는 건 비극이라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한 현명한 ㅜ 4.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미국이, 자유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를 가난으로 채우려 기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 제국은 오늘날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위협입니다… 차베스, 2006. 7. 27, 모스크바" 5. "단어들이 괴롭힘을 당한 나머지 정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주의, 자유, 진보 같은 단어들은 그들만의 독방으로 돌아가면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단어들도 있다. 받아들여지지 않던 제국주의, 자본주의, 노예제 같은 단어들이, 거의 모든 경계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고, 이전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세계화, 자유시장, 자연법칙 같은 사기꾼들이 활개를 친다. 해결책: 가난한 자들의 저녁 대화. 거기에서라면 일말의 진실이 말해지고 지켜질 수 있다" 6. "나는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 그 침묵들에 화가 났어요. 그것들이 나를 분노하게 했죠. 말없음은 미덕이고, 당연히, 종종 꼭 필요할 때도 있겠죠. 하지만 그녀의 침묵들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그녀는 삶이란 하나의 사고일 뿐이라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주워 들고 어떻게든 다시 붙여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내며 나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데이트 중이던 러시아 무기상이 살해당한 걸 알고도 관심도 두지않고 떠나버린 외교관 "니닌하"에게 분노했떤 에이다 7. "라프". 통금 시간을 어기고 일했다는 이유로 전차를 탄 독재정권에 기관총을 맞은 13-14살 소년 환자. 5발 쐈는데 3발 빗나갔다며 안도하는 안타까운 ㅜ 8. 중간에 여러 사람을 속에 품었던 이야기꾼 친구를 만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에이다"가 자신과 "사비에르"를 위한 이야기꾼이 되었던 건 아닐까 9.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10. "지옥은 돈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고안한 것이고,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선 그들의 처지가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두번째로는 약속을 통해, 말을 잘 듣고 충직하게 지내면, 다른 삶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들도 지금 이 세상에서 부를 통해 살 수 있는 것과 그 이상의 것까지 즐길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서 말이다. 지옥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교회의 과시적인 부와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개적으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축적된 부를 일종의 성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의 시련은 너무나 깊다. 이젠 사후의 지옥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제외된 사람들의 지옥이 지금 이곳에 세워지고 있으며, 똑같은 경고를 전한다. 오직 부만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경고를" 11. "세상 속에 있다는 건 고통이겠죠. 그 시가 맞아요"
하이연
4.5
사랑으로 말하는 저항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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