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하고 천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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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새로운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첫 번째 책으로 뮤지션 김사월과 시인 이훤이 일 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고상하고 천박하게』를 선보인다. 책 제목은 김사월의 글 중 <침실 책상에서는 최대한 고상한 것을, 거실 책상에서는 최대한 천박한 것을>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렇듯 서로 대조되는 이미지나 시선이 두 사람의 글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처음 '둘이서' 시리즈를 제안했을 때, 이훤은 친구 김사월을 바로 떠올렸다. 그는 친구의 글이, 특히 산문이 늘 좋다고 생각했고 김사월의 블로그를 애독하는 사람이었다. 또 둘이서 다양한 주제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하는 바와 지향하는 지점들에 대해 호흡과 이해를 같이 해왔다. 솔직하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글을 주고받았기에 이 산문집은 두 사람이 다루는 주제의 폭이 굉장히 넓으면서도 서로 교차하는 순간들 역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이훤의 사진들(사진이라는 공간을 통해)을 보고 김사월이 음악을 만들 때 생각하는 것들이 교차하거나, 뮤지션 김사월의 음악을 듣고 이훤 시인이 음악 속 숨겨진 리듬을 찾아내는 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두 장르가 닮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시인과 뮤지션이 각자 작업할 때 어떻게 일하는지, 그리고 어떤 고민을 하고, 언제 마음이 괴로운지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글은 아름답다.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꾸민 것이 아니어서, 어떨 때는 노골적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이 우정의 글이 너무나 뭉클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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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조
4.5
김4월 언니. 나는 9월에 태어난 정유주인데, 나이를 모르니 언니라고 할게요. 늘 언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찾아봤다면서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 5년 전 언니가 낸 책 <사랑하는 미움들> 코멘트 여기에 썼는데. 언니 노래 너무 좋아해서, 내가 언니가 쓴 노래에 너무 울고 아팠어서, 거기서 나랑 같은 죽음 냄새가 나서. 언니 노래는 위로가 아니라 더 크고 도저한 고통이라 거기에 공명하는 순간엔 밖으로 나와 내 아픔을 관조할 수 있어서. 그래서 언니가 쓴 그 책에 진짜 반, 거짓말 반 했어요. 솔직히 그 책 별로였어요. 근데 이상한 의리 때문에 별 다섯 개 주고 좋다고 주절주절 느끼한 코멘트 썼어요. 그리고 그 책 알라딘에 중고로 팔았어요. 죄책감 조금 느꼈지만 인세는 사월 언니한테 갔을 테니까 뭐, 하고는. 그 책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쯤 해서부터 언니 노래도 안 찾아 들었어요. 나 자해는 언니 노래 듣는 거였는데 더는 그럴 힘도 없었거든. 여기부터는 자기본위인데, 내가 느끼는 언니는 시를 읊듯 노래하는데. 편지처럼 가사를 쓰는데. 왜 그 책의 글들은 별로였지. 진짜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김사월한테 실망을? 언니는 나를 가장 잘 베는 칼인데? 이번 책 읽고 생각했어요. 김사월 언니는 일기보다 편지를 잘 쓰는 사람 같다. 그럼 내가 너무 좋아한 언니 노래는 일기가 아닌가? 응, 나는 김사월 노래를 남의 일기장 훔쳐 보는 기분으로 들은 게 아니라 편지처럼 열어봤던 거 같다. 언니 노래는 다 나한테 온 편지였다. 나한테 김사월x김해원 알려준 이제는 나한테 연락 안하는 수경언니한테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언니 전애인도 아니고. 언니 노래들은 그때 히읗이었던 정유주 꼭 보라고 쓴 편지였다. 언니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어서 그런 가사로 노래할 수 있는 거였다. 이훤이란 이름은 이슬아 남편으로 알고 있었어요. 솔직히 이름이 너무 멋있어서 그런가 도리어 어딘가 현학적이고 허세가 느껴져 비호감이 된,, 알지 못하는 건 일단 좀 미워하고 보는 게 내 디폴트인지. 결혼식 사진을 마지막으로 청자이자 독자의 특권으로 김사월에 이어 이슬아와 이름 말곤 아는 게 없는 이훤 모두와 일별했어요. (그치만 이성애 결혼식을 틈입해 부른 축가는 세상에서 파천황 김사월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어서. 남의 결혼 축가 10번은 찾아들은 건 나도 처음이에요) 소원해진 언니한테 이제 진짜 최종 마지막 실망.txt 하고 싶었나? 그래서 이 책 읽었는데 이번엔 의리 아니고 진짜로 좋았어요. 남자랑 친해지는 거 불편한 거 참고, 표현 후진 거 아는데 남성성 스펙트럼에서 보기 드문 위치의 유장한 ’남자‘ 이훤과 편지로 갈마들며 직조한 우정. 작가 발라버리는 기세와 내 친구 남편 내 친구로 만든 거. 이제 내가 이훤의 작업이 궁금해진 거 다. 이거 내 여자친구 밀리의 서재 계정 빌려 읽어서 미안할 정도로 짜릿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별 네개 반 주는 거 짜치죠? 근데 난 너무 나 같은 거엔 만점을 못 주겠는 고약한 인간… 윌리엄 해즐릿이 그랬어요. “고상함을 가장하는 태도가 가장 많은 곳에 반드시 두 배로 많은 상스러움이 있다.” 그치만 사월 언니, 우리가 어쩌다 한 번씩 진짜 고상함의 얼굴을 마주치고 알아볼 수 있는 건 세상에 총천연색의 천박함이 널려있는 덕분 아닐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 우리는 그걸로 노래를 글을 그림을 만들잖아요. 이번 책은 사서 꼭 좋아하는 친구한테 줄게요. 걔가 되게 시적인데 꼭 시를 모르겠는 것처럼 굴거든요. 2025.4.4 히읗이었던 유주가
셔니
4.5
나 좋자고 하는 존경이 아닌 진짜 깨끗한 존경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질투라는 놈과 진흙탕에서 씨름하는 거겠지.
소덩이
3.5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주변 공기가 부드러워지는 느낌 아니? 네 글에서 그런 냄새가 나서 넌 사진을 참으로 사랑하고 시기하고 아낀다고 생각했다.
응수
4.0
같은 이유를 기반으로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괴로운 점
si
3.5
근데 슬픔을 팔아서 받은 것들로 행복해도 된다. 가장 중요한 걸 내어 준 거잖아.
yoon
1.5
페이지를 넘길수록 둘의 편지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았다
오병훈
4.0
편지, 서간문이라는 매체의 물성에 대하여. 모든 것이 쉽고 빠르게 전해지는 시대이다. 클릭 몇 번이면 메일을 보낼 수 있고, 전화와 텍스트를 주고받고 실시간 소통이 즉각 가능하다. 시대상의 변화와 기술의 진보에 따라 수 많은 매체는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이 탄생한다. 최근, 전보 서비스는 운영을 종료했고, 삐삐라는 수단의 사라짐과 동시에 숫자로 나누던 간단한 메세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편지는 죽지도 않고 살아있다. 차가운 물성들로 가득해 따뜻함이 결여된 동시대에, 편지의 존재는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우리 저마다의 소통을 대변이라도 한다는 듯 떳떳하고 고고하게 존재한다. 사월과 훤의 서간문도 같은 지점에 서있다. 상대에게 보내는 편지는 결국 너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는 거라고 그들은 서로에게 귀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귀기울이고 서로에게 질문함과 동시에 본인 스스로에게도 질문한다. 심보선 시인의 <그을린 예술>의 서문이 떠오른다. 각박한 일상 가운데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는 방법으로 글(시)쓰기를 선택했던 시인의 투사적 모습의 발현이 꼭 직업적인 성취가 아니라, 편지를 쓰고 읽는 우리 개개인에게도 자신을 살리는 일로서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간문은 다른 글의 장르와는 다르게, 보낸이와 날짜 등이 특정된다. 과거에서 쓰여 미래에 누군가에게 읽힌다. 글쓴이와 독자가 분별되어 존재한다. 설사, 나에게 쓰는 편지라 할 지라도 편지를 쓰는 시점의 나와 읽는 시점의 나로써 시공간의 각기 다른 좌표아래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심보선 시인의 서문을 소개하며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사월과 훤의 편지는, 서로를 살리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누군가의 몸과 마음도 살린것이다. 심보선 <그을린 예술> 中 서문 “오히려 소외되고 내몰리는 각박한 삶 속에서 작동하는 소박하지만 생생한 예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인 내가 꿈꾸어 왔던 꿈이기도 한다. 회의 시간에 짬짬이 남몰래 시 한 편을 써 내려 갈 때, 나는 투사나 영웅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잘,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이러한 동경과 소망은 소시민의 자기 위안으로 치부할 수 없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추구되는 소박하고 생생한 꿈은 사회구조가 할당한 역할과 기능을 거스르는 장소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을린 예술은 지나치게 엄숙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다.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그을린 예술은 불길의 위협 앞에서 웃고 노래하고 춤춘다.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을린 예술은 삶을 재창조하려 한다. 그을린 예술은 우리에게 삶의 주인 자격을 되돌려주려 한다.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
HISUTORY
3.0
울지 않던 시절에 내가 잘 흐르지 않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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