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로컬의 관계를 다룬 최초의 저작이자 고전
롭 윌슨과 위말 디싸나야케가 엮은 이 책은 영미 학계에서 글로벌/로컬의 관계를 다룬 거의 최초의 저작으로 이후 관련 저작이 많이 쏟아졌음에도 글로벌/로컬 간 모순과 갈등을 탐구한 이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이 책이 전 지구화라는 세계적 물결이 국민국가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혹은 그것을 우회해 로컬에 끼치는 영향을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로컬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통해 문화 연구를 국민국가 단위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 포스트국민국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지구화 시대 문화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문화들과 마주치고 뒤섞이는 일이 일상화하고 있다. 지구화가 본격적 이슈가 되기 전 근대적 국민국가의 공간에서도 문화들 간의 횡단과 접속은 늘 있었던 현상이지만, 이를 문화 연구의 본격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국민국가의 경계 내에서는 다른 국민 문화에 대한 비교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주로 국민 문화의 문화적 ‘본질’과 ‘기원’을 추적하거나, 국민 문화의 정체성과 우수성을 창안하는 작업이 문화 연구의 주된 과제였다. 이런 연구에서 로컬과 로컬 문화를 강조하는 주장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고, 로컬은 국민 문화의 본질과 정체성에 흡수되지 않을 경우 장애와 곤경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문화 간 접촉이 빈발하면서 로컬 문화가 글로벌 문화와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물론 지구화는 세계적 단일 시장을 형성하고 초국적 정치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면서 국민국가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문화를 로컬에 강요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세력은 국민국가와 그 문화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곧장 로컬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무매개적 상황 때문에 지역적 존재와 삶은 글로벌적인 것과 더욱 첨예한 긴장 속에 놓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로컬에 대한 각성이 생겨나기도 한다. 국민국가의 압력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제 국민이라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환상의 스크린은 많이 약화되었다. 그 사이에서 로컬은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지구화와 지역화, 글로벌적인 것과 로컬적인 것의 동시적 연동과 상호 침투의 강화를 지적한다. 이들은 대부분 글로벌/로컬의 관계를 주목함으로써 그동안 국민국가에 의해 억압 및 배제된 이질적 차이와 복합성은 물론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역 문화와 그 시간적 리듬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글로벌/로컬의 배치는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간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그 사이의 상호 접속과 문화 횡단, 혼종 문화에 주목한다.
책의 구성
1부 ‘전 지구화’의 글 여섯 편은 로컬 공동체, 민족, 지역을 다른 것으로 분열시키는 전 지구화의 지속적 과정과 힘을 다룬다.
〈로컬적인 것 속의 글로벌적인 것〉에서 아리프 딜릭은 로컬 공간의 사회적 역학을 20세기 내내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내에서 준사회주의적이거나 적어도 이종 언어적이고 대안적인 시공간을 여전히 형상화하는 것으로 이론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으로는 중국 마르크스주의와 제3세계 사회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게릴라 마케팅이라는 의제로 나아가기도 한다.
〈로컬주의, 글로벌주의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에서 마이크 페더스톤은 ‘글로벌 문화’를 통해 재형성된 사회학을 동질적 기술 체계와 이질적 적응이 만나는 다층적 구성체로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초국적 사회학에 대한 자신의 학문적 평가를 대처 총리 시기의 영국에서 로컬화한 정체성을 가진 노동 계급 공동체의 문화 역학 내에 위치 짓는다.
미요시 마사오는 초국적화를 “식민주의의 행정적·점령적 양식이 경제적 유형의 식민주의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대체되는” 일방적 과정으로 평가하는 비판적 관점을 견지한다. 따라서 〈경계 없는 세계?〉에서 원주민에 대한 그의 분석은 “식민화한 공간의 역학”을 자본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이미 시달리고 있는 정치 투쟁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 “일단 세속적 서양의 시간 정치 속으로 흡수되면 식민화한 공간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되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일단 주변부의 토착민이 자신들의 전 식민성(precoloniality) 밖으로 끌려나오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소망이나 성향과 상관없이 외부 세계의 지식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경고한다.
요시모토 미츠히로의 〈현실적 가상성〉은 저항이나 장소의 정치학을 중지시키는 듯한 섬뜩한 논리를 통해 생활 세계와 육체를 상품화하고 가상화하는 한편, 역사를 이미지로, 나아가 ‘상품 이미지’를 초국적 기업의 이윤 확장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하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순환적 힘을 보여준다. 이런 탈토대화 과정을 그는 가상화라고 일컫는데, 이 과정은 순수한 형식의 “자본주의의 기본 역학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글로벌/로컬은 더 이상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탈맥락화한 재현, 즉 “끝이 없는 이미지”의 세계 공간을 가정한다.
하미드 니퍼시의 〈공포증적 공간과 경계적 공포〉는 이른바 ‘초국적 독립 영화’라는 장르의 출현과 ‘초국적 경계성’의 영토에 초점을 두면서 터키 및 이란의 망명 영화감독들이 재현한 ‘밀폐공포증적 공간 형태’를 조명한다. 그에게 초국적성은 장소를 ‘문제적인 경계성’의 틈새적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초국적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틈새에 존재하고 뿌리 뽑혔으며 집을 상실했다는 것, 즉 “디스토피아 혹은 유토피아 두 가지 양식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적 미디어 스펙터클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엘라 쇼하트와 로버트 스탬의 글은 지구성에 대한 비전이 갖는 권력/지식의 역학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스펙터클과 서사는 지배의 불균등한 중심부 및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다른 글들이 문화적 재생산의 동시대적 양식과 씨름하며 초국적 스펙터클의 정치학을 탈신비화하고자 하듯이, 2부 ‘로컬적 접속’에서 필자들 역시 포스트식민적 혼종성이라는 편리한 읽기를 논박할 수 있는―일본에서 할리우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캐나다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로컬적 배경과 문화적 이미지를 통해 글로벌적 과정, 상호 작용, 장르, 코드에 초점을 둔다.
3부 ‘글로벌/로컬 분열’은 5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컬적 저항 운동과 문화가 자본의 매개 속으로 흡수될 처지에 놓여 있는 다양한 장소 및 장르를 검토한다. 데이나 폴런의 〈글로벌주의의 로컬주의〉는 상호 텍스트적 영화 아카이브를 구축하며, 크리스토퍼 코너리는 〈대양감과 지역적 상상계〉에서 냉전 질서로부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라는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질서로 나아가는 환태평양 문화가 태평양을 경제적 공동 번영과 문화적 재발명의 새로운 변경으로 형상화해온 방식을 살펴본다. 문학에서 정치경제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경계 없는’ 지역성은 ‘대양적 의식’의 가능성과 기만을 나타내며 초국적화의 불균등한 정치에 의해 훼손당한다.
〈굿바이 파라다이스〉에서 롭 윌슨은 다문화적인 미국적 상상, 미시적 국가 내의 초국적 관광 산업, 그리고 하와이 주권 운동과 관련한 포스트식 민적 위치의 정치학 간 모순을 분절하기 위해 하와이의 ‘로컬’ 문학과 영화 생산을 살펴본다.
영화 〈비정성시〉에서 새롭게 서술한 1947년 2월 28일 사건(타이완 원주민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항거한 사건)이 타이완의 문화 정치에서 갖는 의미를 연구해온 랴오빙후이는 “타이완의 작가들이 로컬적 지식과 외국에서 온 정보를 뒤섞고, 토착적이고 수입된 장르와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글로벌적인 것과 거시정치적인 것에 대한 유동적 시각을 통해 경쟁과 저항의 가능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