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송경원이 아껴왔던 영화를 향한 고백
“이런 사람이 뭘 사랑한다고 할 땐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15년 동안 쓰인 그의 연서가 완성됐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씨네21》 편집장 송경원의 첫 비평집이다. 대체로 영화평론가의 시작은 영화기자이다. 송경원은 드물게 영화평론가로 데뷔한 후 영화기자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영화의 효용과 의미를 거대 담론으로 끌어올리는 일보다, 영화의 한 장면이 된 우리의 삶과 기억을 조명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비평가이다. 그래서 그는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는 영화, 나의 지난 실수를 대변하는 영화, 다른 이의 삶을 나의 삶과 견주어 볼 수 있는 영화에 마음을 내주고, 온 힘을 다해 쓴다.
이 책에 실린 스물여덟 편은, 송경원이 15년 동안 써온 비평 중 그의 관점과 세계가 응축된 글들로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송경원의 첫 비평집 출간 소식을 들은 많은 시네필은 ‘드디어!’를 외쳤다. 영화평론가 송경원의 15년 궤적을 한 권의 책으로 따라 읽다 보면, 나에게 짙게 번져오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송경원이 15년 동안 영화와 주고받은 대화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영화였다”
송경원은 평론이 영화의 의미를 바꾸거나,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영화가 있다는 것은 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역사를 재현하면서도 영화가 결코 현실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어떤 영화들은 그 사건이, 그들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며 세계의 일부가 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토착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1961년 대만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 아무리 사실과 역사를 기반한 이야기라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영화가 진실까지 밝힐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한정된 스크린의 빛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나의 역사적 뿌리’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을 시인한다.
2017년 국내에서 처음 개봉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본 저자는 과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변화가 생겼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나를 바꾸지 않는다. 변한 나의 모습이 영화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변한 세상의 모습을 영화로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송경원에게 영화는 일종의 좌표이다. 이 책의 표지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인 것도, 시간이 흐른 후에 저자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그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계속해서 지나간 영화와 대화를 시도하며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에필로그 2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이터널 선샤인〉을 새로 쓰며, ‘지나간 영화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을 듣는다. 그가 끈질기게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상에서 지나친 풍경들을 낯설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서 낯선 세계란, 과거에 놓인 자신이고, 당시에 추스르지 못한 관계의 결별과 감정의 부재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 내 것 같다고 느낄 때, 영화는 지나간 것들과 우리를 연결해 주고, 우리는 뒤늦게 깨달은 갈등의 의미와 화해를 ‘운명’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송경원 역시 이 책을 마지막 장을 완성하며 영화를 ‘쓰는’ 일이 ‘운명’이었음을 고백한다.
“영화가 우리에게 진실의 말을 걸어온다면 그것은 영화 안에 있지 않다. 진실은 오직 영화와 나 사이 어딘가에서, 때마다 다른 형태로 피어난다.”(12쪽)
극장 밖으로 인물들이 걸어 나올 때
송경원의 관점을 잘 정리한 또 한 편의 비평이 〈보이후드〉이다. 〈보이후드〉는 12년 동안 매해 15분씩 찍은 컷을 연결한 영화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12년과 나의 12년이 똑같이 흐른 것이다. 그들이 겪은 어린 시절, 성장통, 주변 환경의 변화를 우리도 똑같이 겪었다.
누구나 겪은 평범한 이야기지만 송경원은 이 영화가 평범하기 때문에 고전의 반열에 오를 거라 확신한다. 영화의 시간과 실제 시간의 간극을 줄이는 편집과 연결을 고심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적 리얼리티를 구현해 낸 감독 링클레이터를 추종하는 이유는 당연해 보인다. 〈보이후드〉가 끝까지 영화의 시간을 인지함으로써 “서사에 갇히지 않고 영화 바깥에서 관객과 조응”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현실을 환기할 수 있는 거대한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연과 무의식, 불확정성으로 가득한 삶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고, 그러한 세계에서 함께 성장했다는 동질감이기도 하다.
극장을 빠져나와서도 이어질 우리의 일상처럼 인물들의 시간도 스크린 뒤에서 여전히 흐를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둔 채 영화는 현실을 닮으려, 우리는 영화를 닮으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이 불가능하고도 아름다운 대화의 시도가 이야기를 극장 밖으로 오래오래 이어지게 한 것이리라.
“극장의 불이 모두 켜지는 순간 당신도 그 요소 중 하나가 된다.”(38쪽)
영화는 취향이 모이는 곳이다
송경원은 영화 외에 게임과 드라마, 애니메이션 비평에도 언제나 진심이다. 문학과 영화를 기반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나를 흔든 문장은 대부분 만화책에서 마주했다”는 저자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이미 ‘덕후’로 소문나 있다. 보고 싶지 않은 영화여도,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모를 독자들과 연결하기 위해 끝까지 보고 써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영화기자이지만, 보고 싶고 쓰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이 첫 번째로 소개하는 영화〈프렌치 디스패치〉에 저자가 쓴 첫 문장은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 아닌 저자가 현재 자리한 곳을 묘사한 것 같다. “매체가, 시대가, 삶이 바뀌고 있다. 끝자락에 선 기분이다. 저항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순응하며 살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유일 영화잡지라는 타이틀을 가진 《씨네21》이지만 유튜브와 OTT의 일상화로 극장의 위기론이 감도는 오늘날, 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애호가들이 기댈 수 있는 자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글〈환상의 마로나〉에 대해 “딱히 비평이나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화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 비평,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지만, 우리의 감정과 취향을 건드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책을 닫는다.
그는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는 어떤 형태로든 닿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씨네21》에서 ‘송경원의 덕통사고’라는 코너를 연재하고,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맡으며 개개인의 취향을 지지하고 기꺼이 그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많은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취향이라는 연결고리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드라마 〈파친코〉,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애니메이션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 만화책 《3월의 라이온》 등이 책에 포함된 걸 보면 저자의 활동 영역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취향을 가진 인간 그리고 사적 이야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추천사에서 평론가 송경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온화한 편이지만 그건 그의 화법이 겸손해서이지 주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송경원이 영화를 사랑하는 태도이며, 취향을 응원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 개개인의 삶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어쩐지 〈프렌치 디스패치〉에 등장하는 편집장 아서(빌 머레이 역)와 《씨네21》의 편집장 송경원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