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쑹녠선 · 역사
4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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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어판 서문 옮긴이 서문 들어가며: 사라진 비석과 실체가 불분명한 강 동아시아의 역사적 공간 다변적 로컬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1장 경계를 넘다: 두만강 지역의 사회생태학 두만강 지역: 청의 동북 대 조선의 동북 청과 조선의 초기 협상 위기의 동아시아, 연계망 속의 두만강 2장 왕조의 지리학: 경계 획정의 수사 국경회담 이전의 지리 지식 감계: 의례적 경쟁 청 국경 형성의 연계망 국경지대의 지도 제작 왕조의 변경 지리학: 이중하와 오대징 3장 간도 만들기: 경계를 넘나드는 사회의 유동성 간도의 형성 토지소유권, 생산 관계, 민족 관계 그리고 교역 토비: 국가와 사회의 사이 4장 변경 길들이기: 국가권력의 침투와 국제법 청: 내지화와 귀화 러시아: 철도 식민주의와 공동행정구역 한국: 군사화와 영토화 일본: 아시아를 선도하고 만주를 정복하고 한인을 ‘보호’하다 국제법의 도래: 새로운 담론 5장 다시 정의된 경계: 다층적 경쟁 국가·비국가 행위자들의 경쟁 간도협약을 향하여: 갈등의 세 가지 층위 공간적 상상: 나이토 코난, 송교인 그리고 신채호 6장 다시 정의된 인민: 연변과 정체성의 정치학 연변 사회: 새로운 발전 일본인이 된다는 것: 식민지의 경제와 정치 중국인이 된다는 것: 한인의 수용과 배제 한국인이 된다는 것: 한국 너머의 민족 정치학 맺으며: 우리 땅, 우리 민족 목극등비의 실종과 만주의 변화 한국계 중국인의 정체성 다시 그어진 경계 경계와 역사 에필로그: 영화 <두만강> 감사의 말 참고문헌 주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국 연변 조선족 형성사 “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_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원제: Making Borders in Modern East Asia: The Tumen River Demarcation, 1881-1919)는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가 두만강 북안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면 쑹녠선의 신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교류와 소통의 기억을 소환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단절하고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는 민족국가 중심의 분절적 서사는 자칫 충돌과 대립을 필요 이상 강조하기 쉬우며, 두만강이란 변경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태동했던 그 지역사·지구사적 의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형성 과정을 새롭게 선보인 이 책은 국민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의 전작으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2020, 역사비평사)가 있다.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 토문강이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이 책은 1880년대 조·청 국경 분쟁에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국경인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계를 표시한 비석인 1712년(숙종 38년)의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이를 세운 청 관료 이름을 따서 ‘목극등비’라 칭한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36년(강희 49년) 한 범죄 사건이 양쪽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 아홉 명이 인삼을 캐려고 압록강을 몰래 넘어갔다가 청나라 사람 다섯 명과 마주치자 그들을 살해하고 물건을 훔친 사건이었다. 이 월경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백두산 정상 동남쪽의 어느 산마루를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삼아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었다. 문제는 토문강이었다. 당시 압록강은 수원지가 분명했지만 또 하나의 분계강인 두만강은 산림의 물줄기가 복잡하고 단속(斷續)적이어서 진짜 수원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얼마 후 조선인들은 청의 목극등이 선택한 그 물줄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물줄기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훨씬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의 한 지류인 송화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은 내부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사소한 실수로 청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북경의 청 조정은 이 오류를 알지 못했고 국경지대의 안보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므로 이후 어떤 청 관리도 다시 조사할 일이 없었다. 비석이 세워지고 170년도 넘어 조선인 빈농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분쟁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토문강이 경계인가? 그렇다면 어느 강이 실제 ‘토문강’인가? 송화강인가? 해란강인가? 아니면 두만강인가? 두만강이라면 복잡한 물줄기 중 어느 것이 그 수원인가? 이 논쟁적인 질문을 둘러싸고 1880년대 청과 조선 사이에 영토분쟁이 반복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는 ‘간도’라 하고 중국에서는 옌볜(延邊)이라 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한인 이주민에 대한 통치권이 어느 나라에 귀속되느냐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사안의 급박함은 러시아의 팽창과 결부되어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러시아는 외만주를 점령하고 두만강 하구까지 팽창하여 연해주에 한국인 정착민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다. 즉 두만강 지역(또는 만주 전체)이 이미 몇몇 신구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적이고 다변적인 분계강을 둘러싼 모순은 일본이 조선 통제를 확립한 뒤 만주를 식민화하려던 20세기 초에 청과 일본의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하며 장기화했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서로 다른 시대에도 똑같았을까? 이 책은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확정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1885년의 1차 국경회담 결과 양측은 두만강이 토문강임에 동의했으나 1887년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1909년 이른바 청·일간의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받아들이는 대신 만주의 수많은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경계가 획정되었다.(참고로 1962/64년 북·중 간에 다시 그어진 경계선은 천지의 중앙과 홍토산수를 거쳐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1887년 국경회담 당시에 홍토산수를 두만강 원류로 지목했던 조선의 주장을 이번에 중국이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백두산의 남쪽 부분과 천지의 절반 이상(54.5%)을 북한이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쑹녠선은 수십 년에 거친 국경 분쟁의 맥락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작성된 자료를 조사하여 한중일 3국의 시점에서 이 문제를 다층적으로 설명한다. 국경의 역사적 의미가 1712년의 정계비 설치에서 1885-7년의 1, 2차 조·청 국경회담, 1909년의 간도 협약까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문제 상황을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며 그 전화(轉化)와 생성의 원인을 탐구한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5)의 승리,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1905)를 거치면서 1907년, 두만강 국경 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의 중·일 국경협상은 1885-7년에 있었던 조·청간 국경협상과 비교할 때 그 내용과 목적 모두 달랐다. 더 이상 종번과 포용에 기초한 ‘왕조의 지리학’ 차원의 경쟁이 아니었다. 논쟁에서 새로운 증거 제시도 없었고 현장 합동 조사도 없었다. 실제 갈등은 한국 이주민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중·일 양국의 국가 건설을 둘러싼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수백 년 전에 형성된 경계를 어떻게 국제법과 영토 국가라는 새로운 체제에 맞게 재규정할지를 둘러싼 담론 차원의 경쟁이었다. 간도 분쟁은 이제 인구와 국경을 둘러싼 청과 조선 사이의 충돌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가건설 경쟁으로 국면이 전환된 것이었다. 쑹녠선은 이 작은 변경지대에서 발생한 충돌과 담판, 타협에는 심각한 지역사·지구사적 의의가 담겨 있다고 했다. 두만강 국경 ‘만들기’ 과정은 바로 동아시아 삼국이 새롭게 건설되는 과정이었다. 간도 사람들이 ‘국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동아시아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연변)는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간도를 둘러싼 갈등은 궁극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향한 경쟁 청은 19세기 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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