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이름, 몰랐던 이야기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아는 예술가들의 일상적인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처음 완성된 순간부터 명작으로 인정받은 예술품은 생각보다 드물고, 작품만큼 고귀한 인품을 소유한 예술가는 더더욱 드물다. 그 이면에는 약빠른 조작, 대중의 오해 그리고 뜻밖의 행운이 숨어 있다.
이 책은 역사에 가려져 졸작으로 남을 뻔한 작품들이 사소한 계기로 명작으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던 관계가 아름다운 우정 또는 로맨스로, 베토벤처럼 성마르고 인간적으로 존경하기 힘들었던 예술가가 신에 버금가는 완벽한 인격체로 추앙받는 현실 뒤에 가려진 이야기를 가벼운 터치로 짚었다.
노새 탄 나폴레옹을 상상할 수 있는가_자크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하면 떠오르는 그림 하나가 있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백마에 올라타 전쟁터를 누비는 모습을 담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다. 프랑스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이 초상화 덕분에 나폴레옹은 용맹한 장군의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프스 산을 넘을 당시 나폴레옹이 타고 있던 것은 사나운 백마가 아닌 얌전한 노새였으며, 선두에서 군대를 이끌기는커녕 안전이 확인되면 뒤를 쫓았다고 한다.(125쪽) 평생 권력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호시탐탐 출세의 기회를 엿보던 다비드의 기민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9세기에도 얼굴의 잡티를 지워주던 사진작가가 있었다_나다르
이처럼 권력의 냄새를 좇은 예술가가 있었는가 하면 돈 냄새를 잘 맡는 예술가도 있었다. 의사 지망생이었다가 캐리커처를 그리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린 나다르는 사진 기술이 등장하고 얼마 안 있어 사진작가로 전업했다.(279~281쪽) 나다르는 곤충학자 파브르,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 시인 보들레르 등 유명 인사의 초상사진을 독점했다. 현상 과정에서 얼굴의 잡티를 지워주는 서비스를 제공한 나다르는 고가의 초상사진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회화에 비해 더욱 극명한 사실성과 저렴한 생산비용을 장점으로 앞세우며 세상에 등장했던 사진이 사실에 대한 왜곡(?)과 차별화된 고가 정책을 통해 기술에서 예술로 인정받은 역설적인 순간이다.(284쪽)
자기 얼굴은 그대로 그리지 못한 사실주의 화가_귀스타브 쿠르베
천사를 그려달라는 의뢰인에게 “천사를 데려오면 그려주겠다”고 답할 만큼(269쪽)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여러 버전의 자화상을 남겼다. 자화상 속 그의 모습들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부터가 사실주의 화가로서의 명성을 의심케 하지만, 더 큰 반전은 따로 있다. 바로 그의 초상사진이다. 날렵하고 고상한 인상이 강조된 자화상과 달리 사진 속 그의 모습은 몸집이 크고 펑퍼짐하다.(272쪽) 쿠르베는 자신만큼은 보이는 대로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위조지폐에 팔린 네덜란드의 국보급 회화?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우리에게 친숙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그 흔한 자화상조차 남기지 않은 은둔형 화가였다. 몇 개의 작품을 남겼는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후대 위작 작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알려져 국보 대우를 받았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이 판 메이헤른이라는 미술상의 위작임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 나치의 2인자 헤르만 괴링에게 이 그림을 팔아넘긴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게 된 판 메이헤른은 법정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이며 자신의 죄목이 ‘나치 전범’이 아닌 ‘사기’임을 입증했다. 2년간의 심리 끝에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은 위작으로 판명되었고, 나치에게 위작을 넘긴 판 메이헤른은 대중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괴링이 위조지폐로 그림 대금을 지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건 때문에 페르메이르의 작품 <버지널 앞의 여인>은 10년이 넘도록 위작 논란에 시달렸다.(55~56쪽)
모차르트는 개가 따랐고, 베토벤은 사람이 따랐다_모차르트와 베토벤
불세출의 음악가로 칭송받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생애와 작품으로는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지 몰라도 장례식만큼은 베토벤의 압승이었던 것 같다. “신문기자처럼 일하며” 626곡의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는 서른여섯의 나이로 1791년 숨을 거두었다. 폭우 속에 치러진 장례식 행렬에는 모차르트가 키우던 개 한 마리만이 쓸쓸히 뒤따랐다.(144쪽) 괴팍한 성격 탓에 친구라고는 없던 베토벤의 장례식 풍경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1827년 사망한 베토벤의 장례식 행렬에는 온 도시의 사람들이 동참했고, 그의 관이 지나갈 길을 트기 위해 군대가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146쪽)
예술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의 여러 표현 중 하나
가십이나 뒷담화로 보일 수 있는 이 에세이들로 예술가와 작품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싶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오히려 예술의 아우라 뒤에 감춰진 바로 통속성이야말로 작품의 가치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파편임을 31명의 예술가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위대한 예술과 작품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에 의해, 그들의 일상과, 갈등과, 오해와, 전략 속에 완성된 것임을 깨달을 때, 예술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의 여러 표현 중 하나임을 인지할 때, 어렵게만 느껴지는 그 가치들이 한결 더 친근해지지 않을까.
*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7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