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에서 포스트해체주의까지
- 위반하고 발작하며 진화하는 현대미술과 철학의 엔드게임
슈퍼마켓에 파는 비누 상자를 똑같이 만들어 전시한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미국의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이 작품을 가리키며 ‘예술의 종말’을 고한 지 20여 년이 흘렀다. 2009년, 이광래 교수는 이에 더해 미술과 철학은 ‘엔드게임’, 즉 ‘종말놀이’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즉, 현대미술과 현대철학은 종말을 향한 죽음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80년대부터 푸코 등의 프랑스 해체주의를 국내에 소개한 이광래 교수가『미술을 철학한다』(미술문화)에 이어 심명숙 교수와 함께 두 번째 미술철학 저서를 출간했다. ‘엔드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미술의 종말을 논한『미술의 종말과 엔드게임』이다. 엔드게임이란 체스 용어로 치밀한 계획과 작전이 필요한 중간단계와 달리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놓은 채 게임을 끝내는 최종단계를 가리킨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일어난 문화운동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데리다와 푸코로 대표되는 해체주의를 거쳐 그 이후인 포스트해체주의까지 엔드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미술과 철학을 돌아보고 있다. 엔드게임은 미술의 생존방식이며, 현대미술사를 이해하는 해석의 틀인 동시에 미술진화론의 진화법칙이다. 본래 모든 현상은 생존의 위협이 클수록 더 큰 에너지를 원하는 법이다. 그래서 마지막 게임을 벌이고 있는 현대미술과 철학은 모든 양식을 위반하고 광기로서 발작하며 동시에 진화한다.
엔드게임 시대의 현대미술 -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책은 크게 일곱 장으로 나뉘어진다. 1장에서는 엔드게임으로서의 미술과 철학을 소개한다. 미술에서 엔드게임이라는 용어는 1981년 뉴욕에서 로스 블렉너, 피터 핼리 등이 추상미술의 종말을 선언한《엔드게임》전에서 처음 쓰였다. 그러나 이 게임은 사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이 그전까지의 양식을 파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철학의 엔드게임 역시 19세기 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시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장과 3장에서는 20세기의 거대담론인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엔드게임의 관점으로 논한다. 데리다로 대표되는 해체주의는 지난 시절의 구조주의자들이 ‘구축’한 것들을 ‘탈구축’, 즉 해체한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리오타르 등이 주창한 이러한 프랑스 해체주의의 정신은 60년대 이후 미국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세계적인 문화코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자가 20세기 후반의 정신적 ? 철학적 입구라면 후자는 그것을 통과해 나온 문화예술적 출구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지향해온 체계화, 총체화, 거대화 등 일체의 거대하고 거창한 이야기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해체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오늘날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만큼 내부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의 병적 징후를 반영하는 문화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찰스 젠크스는 어떤 전통과 바로 이전 전통 간의 절충주의적 혼합이라고 주장하며,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시대엔 ‘시뮬라시옹 (simulation)’ 외에 어떠한 ‘실재’도 없으며 복제품의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으며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서 보듯이 대량생산을 지향하는 현대는 복제체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면을 강조하며 엔드게임 현상으로 재조명한다.
엔드게임 시대의 현대미술 - 양식과 평면의 해체부터 광기까지
이러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철학의 역사가 구축해온 것을 뿌리뽑으려 하는 해체욕망은 재현미술의 종말을 외치게 할 정도다. 4장에서는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들을 예로 들며 현대미술의 엔드게임판에 직접 들어가본다.
특히 미셸 푸코와 피터 핼리, 질 들뢰즈와 프랜시스 베이컨을 짝을 지어 철학의 탈구축적 사유가 어떻게 현대미술에 삼투해 들어갔는지 조망한 부분이 흥미롭다. 피터 핼리는 이른바 네오지오(neo-geo, 신기하추상)의 기수로 해체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현대미술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큰 특징은 모더니즘 미술의 갖가지 양식과 평면을 해체하려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은 이른바 양식의 해체경연장이나 다름없다.
5장에서는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를 징후와 양식에서부터 찬찬히 되짚어본다. 과연 모더니즘을 언제까지로 볼 수 있는지, 이른바 다원주의로 칭해지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또 1950~60년대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뉴욕현대미술관 (MoMA)의 역할과 잭슨 폴록을 비롯한 뉴욕파 화가들의 활약부터 추상표현주의의 종말까지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6장 ‘현대미술-발광하는 엔드게임’은 조금 특이하다. 이른바 광기의 관점에서 본 현대미술론으로 저자는 현대미술을 정상이 아닌 비상(非常)으로 본다. 현대미술이 자연상태를 위반하고 거역하려 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이어진 대리표상화, 즉 대상을 재현하는 미술에 대한 권태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대미술에는 광기에 의한 일탈의 미학이 새로운 덕목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는 반 고흐나 뭉크, 달리 외 수많은 미술가들을 예로 들며 20세기 미술계를 광기 현상으로 풀어나간다.
게임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종말 이후의 미술
7장에서는 미술의 종말과 해체주의 이후를 예상한다.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아서 단토의 ‘예술 종말론’에 대해 되짚어본 후, 해체주의 이후, 즉 포스트해체주의 시대의 미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논한다. 저자가 그리는 포스트해체주의 시대는 무구조, 무경계의 무한공간이다. 점점 파편화되고, 미분화, 분산화되는 현상이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실제 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확장되어 세상은 절대적 무구조 상태가 된다. 미래의 미술은 이러한 ‘확장현실’을 통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이 될 것이다. 양식의 축제와도 같았던 20세기 미술을 ‘엔드게임’이라 한다면 21세기의 미술은 한마디로 ‘스펙터클 쇼’가 될 것이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새롭게 해석
아서 단토는 이미 25년 전에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고『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를 출간하였다. 단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양식이 아니며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는 식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는 현대의 예술을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동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미술의 종말과 엔드게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지속적 생성이든 단절적 해체이든 새롭게 대두한 문화예술 사조와 문화양식임에는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엔드게임이란 끝내는 판이긴 판이되 진정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예술의 종말’을 정말 ‘예술’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단토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단토의 ‘예술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엔드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미술의 종말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1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사조나 주의로도 이 세상을 정의내릴 수 없을지 모른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이론들은 사라져가고 이제는 우주의 별처럼 셀 수 없는 각각의 개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단토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내러티브,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제는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때다.『미술의 종말과 엔드게임』은 과거, 현재, 미래를 가로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