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적 소망 뒤에 펼쳐진 울면서 농담하는 사람의 세계관”
꾸준하고 단단한 사람의 섹시함을 동경하지만
나는 아무리 주물러도 흐물거리는 슬라임.
그렇다면… 섹시한 슬라임이라도 되고 싶어!
작은 독립출판물 한 권을 만들었다가 생애 첫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인도네시아에 이어 일본 독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 연정 작가가 섹시한 슬라임으로 돌아왔다.
작가는 “한없이 가볍고 점도가 낮은 인내심”을 품은 스스로를 슬라임 같은 인간이라 말한다. 자신과 정반대인, 꾸준하고 우직한 사람이 “짜증 날만큼 섹시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결국 속으로 크게 외친다.
“사실은 나도 섹시한 슬라임이 되고 싶어!”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한다.
도발적 소망이 제목에 담긴 이번 책은 한 권의 에세이이자 한 사람의 레시피북이다. 연정 작가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있기까지 어떻게 삶을 조리했는지에 대해, 깨끗이 손질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여기에 더해 ‘봄핑계, 팔리지 않는 핫도그 게임, 섹시한 슬라임, 불타는 금요도서관’ 등 작가만의 독특한 향신료까지 입혀 모든 글의 ’읽는 맛’을 살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운동장 돌 듯 산다. 집을 시작점으로 같은 길을 반복해서 맴돈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려 한다면 낯선 곳을 향하겠지만, 오직 집을 벗어나기 위한 외출이었기에 목적지가 없었다. 유년 시절 내 운동화 밑창은 한쪽만 빨리 닳았다. 조금 기울어진 채로 자주 서성였다. 나의 걸음은 모험이 아니라 방황이었다. 매년 봄을 살아갈 핑계로 삼는다.” _15p 「봄핑계」 중
운동장을 뛰놀던 어린 시절부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 출간 이후까지, 작가의 세계관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종종 자신을 ‘울면서 농담하는 사람’이라 소개하는 연정 작가는 이번 책을 통해 슬픔이나 고통을 견디는 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을 풀어냈다. 정말로 울면서 농담하듯이.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을 들으면 힘이 빠졌다. 일단 난 체력이 안 좋다. 성격상 성실함과 어울리는 일은 전부 지겨워한다. 그런 나에게 꾸준히 달려야 하는 단 한 번의 경기란 최악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숨이 차고 지루한 기분. 내 인생은 몇 초간 온 힘을 다해 달린 후, 자리로 돌아가 김밥을 먹는 느긋한 운동회 같기를 바랐다.” _137p, 「서른관람평점★★★★☆」 중
글과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일까. 생애 첫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 오르고, 인도네시아와 일본에 번역 출판까지 이뤄낸 연정 작가는 오히려 두려웠다고 말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쓰는 두려움’에 대해 연정 작가는 과감하게 말한다.
“솔직하게 고백해볼까. 첫 번째 책이 사랑 받아서 박수를 받았으니 떠나야 하나, 욕먹을 바엔 그만둘까 고민했다. 나약한 생각이 의지를 이겨버리는 상황은 자주 찾아왔다.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는데, 맛이 다 비슷한 레토르트 음식 같을 때. (…) 포기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어. 글과 엮인 삶을 살고서부터 단 한 순간도 묵묵하지 못했다.” _147p, 「묵묵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중
그럼에도 작가가 이번 『섹시한 슬라임이 되고 싶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자들의 사랑과 편지 덕분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연정 작가에게 독자들은 조심스럽고 꾸준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근 3년간 고백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편지로, 이메일로, 한밤중의 메시지로. 얼굴을 마주 보며 듣게 된 고백도 있다. 첫 번째 책을 출간하고 독자님들께 받은 고백이었다. 나는 책에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사실을 고백했다. 월세를 내느라 그만둘 수 없던 노동의 과정과 비싼 딸기 앞에서 주저하는 마음까지 고백했다. 가장 어둡고 불안했던 시기를 글로 잘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마음이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도, 꼭 전해야 했던 마음. 목적을 알 수 없는 마음이 책을 쓰게 했다.” _158p, 「외딴섬의 우체통」 중
그래서 마침내, 우리 앞에 다시 찾아온 연정 작가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또 누구나 사랑을 비웃는 시대에 연정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책의 마침표를 찍었다.
“슬픔 속에 슬픔만 있지 않아서, 구석구석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우리의 외로움은 사랑이 그린 작품이라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잘 살고 싶다는 건, 용감하게 외로워하겠다는 선언. 짝사랑이어도 사랑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다짐.” _82p, 「외로움 목격자」 중
섹시한 슬라임이 되고 싶은 작가는 이제, 세상의 모든 뾰족한 것들을 슬라임 같은 문장으로 덮어둔 책을 우리 앞에 선보인다.
“뾰족한 것들은 전부 슬라임으로 덮어 놓았어요. 뭉툭한 마음을 가졌어도 여기선 긴장 풀어도 돼요.” _5p, 「인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