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실례와 책망 좌절로부터
무관한 새 몸이 되기를”
어둠의 무게와 슬픔의 중력을 거슬러
내일을 향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뽀얀 영혼들
201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손유미 시인의 첫 시집 『탕의 영혼들』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차분한 시선으로 기억과 시간을 세심하게 더듬으며 삶의 내밀한 고통을 드러내고 어렴풋하게나마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을 포착한다. “사는 것 앞에 고개를 숙이”(시인의 말)듯 진지하고 진실한 태도로 생의 본질을 고민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거나 그 육중함에 얽매이지 않는 조용하고도 명랑한 시 세계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시집의 말미에 실린 장시 「속」은 은유적인 대사와 상징적인 이미지로 잘 짜인 한편의 시극을 감상하는 듯한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기성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개성 넘치는 목소리로 “외따롭고 단단한, 용기의 리듬”(추천사, 안태운)을 일구어내는 손유미 고유의 시적 영토를 둘러봄으로써 ‘젊은 시’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탕의 영혼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신뢰하는 에게」) 쓸쓸한 나날을 묵묵히 견디고 그 너머로 향하려는 자의 끈기 있는 기록이다. 시인은 “늦더라도/쓰이고 싶던 사람들이”(「우리 수확 미래」) 쓸모를 찾기 위해 오래 배회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아는 어른을 지날 때 드는 생각」)라고 읊조리는 좌절의 순간을 그리고, 심상히 지나가는 매일 속에서 “충분히 길들었는데, 그걸 모르는 들개”(「기민히 사라진」) 같은 처지의 자신을 예리하게 인식한다. “달아나는 이유 생각나지 않아 하지만/달아나는 게 익숙해”(「쓰르라미 울 무렵」)라는 한마디는 의미도 목적도 잊은 채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우리의 시간을 단숨에 멈춰 세운다. “이웃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제 속도로 다가오는 미래를 비관”(「고양이 담벼락 」)하게 되는 일상적 고통을 서늘히 응시하는 손유미의 시는 그렇다고 허무나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인의 시선이 끝내 가닿아 보살피고자 하는 곳은 그런 날들을 지나는 동안 다치고 닳는 우리의 “작고 말랑한 그래서 약한 마음”(「마음 바닥의 가오리 」)이다.
“신이 멀어/귀신의 손을 잡는다”(「수의(壽衣) 같은 안개는 내리고」)고 말하는 시인은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경한 존재와 목소리 들을 시 속으로 불러들인다. 출처 모를 여러명의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꿈속을 헤매고(「애관극장 앞에서」), 목욕탕의 영혼들에게 근육을 내어주며 새로운 몸이 태어나는 걸 목격하고(「탕의 영혼들」), 지친 마음을 업어주는 ‘마음 가오리’ 위에 올라타 가벼이 유영하기도 한다(「마음 바닥의 가오리」). 이렇듯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 의해 헤매어보고 한결 덜어지고 살짝 떠오름으로써 일상의 중력을 가뿐히 거스른다. “별안간 보이지 않아야 할 게 보이기 시작”(「상영」)하고 그와 어울리는 것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잡귀가 되는”(「수의(壽衣) 같은 안개는 내리고」) 일일지 모르나, 삶이 미워하고 분노하고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나’ 바깥의 존재를 통해서라도 “누적된 피로와 권태 관절의 습관으로부터 자유”(「수면 장소」)로워지는 모습은 따스한 위안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겐 작지만 여실한 미래가 필요해”
넘어진 어제에서 일어나고 싶은 오늘의 우리를 위한 목소리
시인은 바깥의 존재이자 초월적 존재인 영혼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때로 “보고 싶은 영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령 영 넋」) “압도적인 고독과 언뜻언뜻한 외로움”(「순록 부락」)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은 이 난감한 국면 앞에서 체념하기보다 “허망과 무상을 이길 만한 힘”이 간직되어 있을 “작지만 여실한 미래”(「우리 수확 미래」)를 향해 한걸음 더 용기 있게 내딛는다. 서정적 자아인 ‘나’에 국한되지 않고 유령적 존재인 ‘영혼’까지 포함해 보편적인 존재인 ‘우리’로 확장한 시적 주체는 다른 가능성이 “드나들 수 있는 문”(「령 영 넋」)을 폐쇄하지 않으며 “우리에겐 또다른 태양이 남아 있다”(「모두 모여 태양 모양」)고 알려준다. 이처럼 “너른 전망의 가능성을 과감하게 발음”하며 “마땅히 주목해야 할 시적 사건”(해설, 선우은실)으로 자리매김한 이번 시집 『탕의 영혼들』은 무수한 어제를 견디고 다다랐으나 여전히 답보 상태인 오늘날, 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려는 우리를 격려하며 “알맞은 부축”(「부근리 고인돌군」)으로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