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멸을 향한 인간의 헛된 욕망과 그 불멸로 인해 더욱 깊어지는 고독
오늘날 사람들이 괴테의 젊은 연인이자 그와 숱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적 유희를 나누었던 뮤즈로 기억하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바로 베토벤의 연인이었으며 아힘 폰 아르님의 부인이기도 한 베티나 폰 아르님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 곁에 머물렀던 베티나, 그녀는 과연 정말 그들을 사랑했을까?
예순 두 살의 괴테는 지적이며 야심찬 스물여섯 살 베티나를 만난다. 베티나는 끊임없이 괴테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각인한다. 하지만 괴테는 베티나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그의 명성을 통한 불멸임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느끼던 노년의 괴테는 그런 베티나를 받아들일 수도 내칠 수도 없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국 베티나는 괴테의 젊은 연인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된다.
불멸을 향해 베티나가 던지는 몸짓은 아녜스에게서 로라로, 로라에게서 다시 폴로 이어진다. 이때, 인간이 불멸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인간은 베티나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길 원하거나(“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작품 속에서) 로라처럼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길 원한다.(“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작품 속에서)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남기를, 그리하여 불멸하기를 원하는 로라는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더해 간다. 언니 아녜스의 몸짓을 따라 하고, 언니처럼 선글라스를 즐겨 끼되 그것을 자신의 슬픔과 고통의 은유로 포장하며, 실연을 핑계로 자살 소동을 일으키는 등, 로라는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자신을 기억하길 욕망한다.
하지만 욕망을 꿈꾸는 인간들이 잊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불멸은 ‘죽음’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은 죽는 바로 그 순간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다. 어떤 법률도 이제 중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지 않으며 그의 사생활은 사적이길 멈춘다. 사랑하는 이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들, 어머니가 물려준 추억의 앨범 등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이젠 그의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그 후 이어진 불멸을 두고 작품 속에서 헤밍웨이는 “불멸이 나를 두 팔로 꽉 끌어안는 걸 확인한 그날, 내가 맛본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했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불멸은 이렇듯 고독하고, 그렇기에 불멸에 대한 욕망은 허망하다. 살아 있는 매 순간, 살아가는 매 순간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이다.
▶ 셀 수 없는 얼굴 속에 갇혀 버린 고독한 자아
―세계와 단절된, 혹은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 현대인의 초상
아녜스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에 서서 가닥가닥 날카로워진 신경의 끈이 끊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맛본다. 거리를 걸을 때 마주 오는 사람들은 절대로 먼저 길을 비키지 않는다. 그들의 눈빛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적개심으로 번뜩인다. 아녜스는 이 “한계를 넘어선 세상”에서 물망초 가지를 하나 들고 밖으로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세상이 오직 그 ‘이상한’ 물망초로만 자신을 기억하길, 그리하여 자신에 대한 흔적이,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길 바란다.
그녀는 꽃 장수에게서 물망초 한 가지를 살 것이다. 가는 줄기 끝에 작은 꽃이 달린 물망초 딱 한 가지만 사서, 얼굴 앞에 세우고 외출을 할 것이다.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이 그 예쁜 푸른 점 외에, 이제 사랑하기를 그만둔 이 세상에서 그녀가 보존하고 싶은 그 최후의 이미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도록 말이다.-작품 속에서
“자기 삶의 한 순간이 다른 모든 순간들처럼 없어져 버리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서 뽑혀 나와, 어느 날 어떤 빌어먹을 우연이 그것을 요구하는 날, 마치 서투르게 매장된 주검처럼 되살아나리라는 생각에서 오는 고뇌를 쉬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그녀는 동생 로라와는 달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별해 주는 독특한 몸짓, 말투, 이미지 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스스로를 삭제해 간다.
그 무렵,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그러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한 한 여인은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기 위해 한 외곽도로 한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차량 몇 대가 그녀를 피해 가려다 도랑에 처박히거나 나무와 충돌한다. 이 여자의 이미지와 이 사고에 대한 보도는 작품을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그녀가 말을 걸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 말을 듣지 않았네. 그녀는 세상을 잃어 가던 중이었네. 내가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외침에 대답하고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메아리에 불과할 테지만) 우리 자신이 또 그 외침을 듣는 우주의 이 한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네. 그녀에게는 세상이 점차 소리를 잃어 가다가 끝내 그녀의 세상이 되길 멈춰 버렸네. 그녀는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의 고통 속에 갇혀 버렸지. 타인이 겪는 고통을 보고, 자신의 그런 자폐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천만에. 타인의 고통은 이미 더는 그녀의 것이 아닌, 그녀가 잃어버린 세상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네.-작품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오로지 혼자만의 몫으로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그러기에 쿤데라가 ‘호모 센티멘탈리스’라고 명명한 현대인들은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얼굴들 속에 둘러싸여 갇혀 버린 고독한 존재들이다.
▶ 작품 속 인물과 작가의 만남, 소설 안팎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담한 서술
세상과 단절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쿤데라는 아베나리우스 교수라는 인물을 통해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한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자신하는 어떤 세계의 중요성”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세계에서 우리 웃음의 어떤 메아리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아예 그 세계를 통째로 유희 대상으로, 하나의 장난감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해가 질 무렵이면 재킷 속에 부엌칼을 감추고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주차된 차들의 타이어를 하나씩 칼로 찔러 버린다. 어느 날 저녁, 언제나처럼 칼을 품고 거리로 나선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실수로 손에 칼을 든 채 다음 목표 차량으로 접근하고, 이를 목격한 한 여성은 그를 치한으로 오해하여 비명을 지른다. 사람들이 모여 들고 아베나리우스는 강간범으로 체포된다. 하지만 아베나리우스는 끝끝내 자신이 칼을 지니고 있던 진짜 의도를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그러기에 소통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한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몸짓이다.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쿤데라의 오랜 친구로서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들은 만나서 함께 음식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그들이 등장하는 소설인 『불멸』을 비롯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생은 다른 곳에』 등 쿤데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등장인물 아녜스, 폴, 로라는 쿤데라, 즉 저자의 시각으로 서술되고 해석되며 괴테, 헤밍웨이, 베토벤, 나폴레옹, 베티나 등 불멸하는 역사적 존재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철저하게 “에피소드적”으로 등장하는 루벤스라는 인물과 고속도로에 몸을 웅크린 여인이 의미심장하게 배치되기도 한다.
커비
5.0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조영재
5.0
우리의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반면, 타인의 눈에 비친 이미지는 너무나 포착하기 쉽고 묘사하기 쉬우며, 유일한 실재처럼 보인다. 끔찍한 사실은 우리는 그 이미지를 스스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이는 스스로 그 이미지를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하지만 종극에는 그것이 헛수고임을 깨닫는다. 이미지란 겉모습에 불과하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 무관한 '자아의 실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은 천진무구한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철저한 '타인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현대인이 겪는 시련의 대부분은, 환상에 불과한 자아의 유일성을 타인의 눈을 통해 시험받는 것에서 기인한다. 밀란쿤테라는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방법으로 '덧셈형 인간'과 '뺄셈형 인간'을 제시한다. '덧셈형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가꾸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동화시킨다. 하지만 이 동화는 오히려 덧붙인 속성들로 자아의 본성을 상실해가는 과정이다. '뺄셈형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자아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빌려온 것과 덧붙인 것을 모두 추려낸다. 이 경우 연이은 뺄셈에 의해서 자아가 0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쿤테라에 따르면, 눈치를 보지 않고자 다짐했던 인간군상은 모두 종극에는 '극도로 눈치를 보는 인간의 형태'로 변한다는 것이다. FUCK IDENTIFY! 하나의 성공한 자아, 완벽한 자아로 자신의 자아를 통합하려는 행위야 말로 쿤테라가 말한 덧셈형, 뺄셈형인간의 행태이다.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시시포스마냥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매일 무수한 시선이 우리를 꿰뚫는 것은 고통이다. 그것은 거리에서, 병원에서, 수술대에서, 숲에서, 심지어 침대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다. 시선의 부재, 감미로운 고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덧셈형, 뺄셈형 인간이 되도록 교육받았기에 수많은 시선과 우리를 배격시키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저 존재해야한다. 누군가는 당신을 멸치, 비만, 늙은이, 무능력자, 한심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것도 당신이다. 당신의 모자란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똑같이 모자란 당신의 주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아라는 환상을 버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라.
oasisdy
4.5
"시의 목적은 놀랄 만한 사고로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순간을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또 견딜수 없는 그리움에 값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그의 말대로 이 책의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됬어야 했다.
MMXXII
5.0
플라톤의 대화편에 유한한 인간이 불멸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작가가 되어 저서를 남기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때 거창해 보이는 이 불멸에 흥미가 생겼다가 이 책을 읽고는 불멸이란 단지 시끄러운 번잡함과 왜곡 덩어리일 뿐이구나 를 깨달았다. +] 밀란 쿤데라는 이 책의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되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Sean
5.0
‘사람의 본질은 은유로만 포착할 수 있다‘는 문장에서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nanazaraza
4.0
경험에서 떠오른 사유일까. 사유에서 시작한 환상일까. 밀쿤이 소설은 마주한 거울에 갇힌 무한한 거울을 보는 기분이다. 불멸이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보다 부족한 것은 제목의 간지가 덜 하다는 것뿐.
윤현웅
5.0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밀란 쿤데라, '불멸' 中 . 마치 오케스트라를 책으로 옮긴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책으로 적으려면 각 악기들에 대해 한 번에 하나씩 서술해야 하는 것 뿐. 그 모든 에피소드들이 모여 하나의 오케스트라를 이룬다. 스토리는 하나 하나 감상하기에도 아름답고, 전체로 모으면 웅장하다. 멸하고서야 불멸에 이르는, 흔한 철학주제를 이용해 만든 흔치 못한 러브스토리.
houellebecq
5.0
우리의 눈이 타인과 나를 이어주는 가장 원초적인 매개체라면, 그 목적어는 이미지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이미지가 우리 실존의 증거라면, 그것이 왜곡되었던, 진실하던, 우리는 그 이미지와 계속해서 존재할수있다. 현대 문명은 야만적이다. 사진, 영상 등 기술의 발전은 그 이미지의 기록과 전달을 성숙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 그것에 매몰되어 한 사람에 관련된 모든 시각적 이념과 시적 언어를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발전되어왔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에 관한 두가지 경우의 수를 도출할수있는데, 첫 번째 경우는 우리의 육신과 이미지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미지를 조정하고 통제할 수가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는 우리의 육신과 이미지를 떼어낼 수 없는 경우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가 아니고, 이마골로기 또한 왜곡된 개념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과 떼어낼 수 있는 것은 통제가 가능하고, 떼어낼 수 없는 경우는 우리를 대변하지 않는다니, 결국 이러한 모순이 쿤데라의 깊은 통찰력이다. 그 말은 즉, 우리 육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이미지 자체의 연속성은 두 경우 모두 인정되며,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수많은 우연과 이미지들의 굴레에서 해방될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불멸한다고 해서 꼭 내가 불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성숙한건 알지만 그래도 그 굴레를 집어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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