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강준만 · 사회과학
3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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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개그맨 이윤석이 그렇게 잘못했는가? 호남인이여, 왜 그렇게 여유와 관용이 없는가? · 4 ‘호남 차별을 먹고사는 진보’ · 6 ‘정치의 종교화’로 인한 판단력 마비 · 8 댓글 세계는 ‘종교전쟁의 공간’ · 10 보수 언론을 바보로 아는 사람들 12 제1장 왜 호남은 ‘친노’에 등을 돌렸는가? : 호남을 인질로 이용하는‘싸가지 없는 진보’ 야당 내분이 이종격투기인가? · 25 왜 홍세화마저 ‘신성 광주’를 요구하는가? · 28 호남은 언제까지 진보의 ‘인질’노릇을 해야 하나? · 30 왜 호남인이 ‘호남 없는 호남당’을 지지해야 하나? · 31 ‘친노’는 치킨게임을 하고 호남은 늘 당해야만 하나? · 33 호남인은 언제까지 현충일에 음주가무를 삼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하나? · 34 왜 조국은 “내가 호남 사람이라도 새정치연합을 안 찍는다”고 했나? · 35 진중권과 일베는 무엇이 다른가? · 38 “안철수는 제갈량의 ‘천하 3분지계’를 이뤄낼 것인가” · 41 “호남 자민련이라고요? DJ가 하늘에서 통곡합니다!” · 44 김욱과 강준만은 ‘호남의 악마’인가? · 48 적대감과 증오론 새누리당을 이길 수 없다 · 51 왜 ‘호남의 인질화’라는 핵심 메시지를 외면하나? · 54 내가 하면 개혁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반反개혁인가? · 57 ‘호남 팔이’와 ‘DJ 팔이’는 같은 급이 아니다 · 62 김욱의 책에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들’ · 66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싸가지 없는 진보’ · 69 제2장 왜 진보의 이름으로 ‘정치 죽이기’를 하는가? : 정치 혐오를 악용하는 포퓰리즘 개혁보다는 ‘자기 존재 증명’에 집착하는 운동권 · 75 왜 ‘엘리트 대 민중’이라는 이분법은 사기인가? · 77 ‘서울 제국주의’에 찌든 진보 좌파 · 80 “호남 난닝구 정치인들을 물갈이하자는 것이다” · 83 왜 진중권에게 호남 비노 의원들은 ‘쓰레기’아니면 ‘고름’일 뿐인가? · 86 진중권은 정말 ‘계급환원주의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갖고 있나? · 90 진중권은 ‘종교적 주술 행위’를 하는 건가? · 94 박지원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의 ‘고름’이었나? · 100 정치인은 메르스인가? · 103 아니 물갈이 비율은 다다익선 아닌가? · 106 ‘구경꾼 민주주의’를 넘어서 · 108 국회의원의 공항 귀빈실 이용부터 금지하자 · 111 “도둑놈들 사이에서도 분배의 정의가 필요하다” · 115 “모바일 투표는 민주주의의 적, 현역 물갈이는 기만 행위” · 118 “호남인들의 상실감을 교묘히 악용하는 난닝구들의 술책”인가? · 121 ‘호남의 세속화’에 대한 홍익표의 오해 · 124 “호남과 광주는 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 127 “초선 의원과 다선 의원은 애와 어른 수준의 차이” · 130 제3장 왜 친노는 ‘친노패권주의’를 한사코 부정할까? : ‘친노’의 정체성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 · 137 “열린우리당 의원 146명이 친노 네티즌 12인에 끌려다닌다” · 140 “노사모가 노무현을 신격화한다” · 143 친노패권주의를 탄생시킨 2012년 민주당 공천 · 147 문재인을 승자로 만든 2·8 친노패권주의 · 150 친노패권주의 공방전 · 154 혁신위원회는 친노패권주의 술책인가? · 157 ‘친노 프레임’은 선동을 위한 음모인가? · 160 “거듭된 실패에도 권력을 계속 쥐는 게 친노패권주의” · 163 왜 박영선 의원은 인터뷰 도중에 울먹였는가? · 166 “친노패권주의는 정치적 허언에 불과하다”? · 169 친노패권주의는 ‘음모론적인 잣대’인가? · 173 “호남은 진보성 강화에 도움이 안 된다”? · 176 왜 친노는 호남을 지역에 가둬두려고만 할까? · 179 문화평론가 김갑수의 “친노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가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싸가지 없는 진보’ “왜 호남은 진보에 등을 돌렸는가?” “왜 진보의 이름으로 정치를 죽이는가?” “왜 진보는 반감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는가?” 야당 분열, 알고나 욕합시다! 야당 분열과 분당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입을 열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호남 분열’, ‘야당의 절대적 무능’, ‘계파 갈등’, ‘문재인 vs 안철수’, ‘안철수 분당’, ‘친노의 정체’, ‘언론과 지식인’ 등을 주제로 분당의 원인과 본질을 파헤친다. 이에 앞서 강준만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야당 지지율이 경쟁 정당의 반토막 수준이라면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며, 야당과 진보의 성찰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변화는 없었다. 여전한 ‘남탓하기’, ‘진영논리 함몰’, ‘기득권 챙기기’, ‘상대편에 모멸과 상처 주기’로 일관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독자들이 궁금해할 분당의 내막에 대해 다이내믹한 이야기를 펼치지만, 핵심은 ‘정치의 본질’과 ‘인권’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일부 야권과 지지자들은 “분열은 배신이자 자멸”,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분당파들은 정권교체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강준만 교수는 “욕심내지 말자”고 일축한다. 왜인가? 첫째, 그동안 야당과 진보의 행태가 ‘정권교체’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둘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그런 발상에 대해 “새누리당 지지자를 ‘역사의 죄인’보다 못한 사람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운동권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셋째, 선거보다 중요한 게 ‘인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야권 지지자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에게 온갖 모욕과 적대를 표출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모욕부터 ‘지역’(호남)에 대한 모멸까지 전방위적이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폐단이자 야당 분당의 주된 원인으로 ‘정치의 종교화, 인물중심주의, 지도자 숭배’를 거론한다. ‘정책’과 ‘이슈’보단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 중심으로 모든 걸 환원하는 행태가 정치를 피폐하게 만들고, 소통과 화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정쟁을 종교 전쟁으로 몰고 가고, 정치를 종교화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이제 종식시켜야 한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주된 메시지다. 호남 차별을 먹고사는 진보 진보의 실천적 제1원칙은 부당한 차별과 모멸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부당한 차별과 모멸을 용인하거나 주도하는 진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일부 진보는 특정 지역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모멸을 전제로 진보를 해보겠다고 그러니, 그걸 어찌 진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진보라고 해야 한다면, ‘호남 차별을 먹고사는 진보’라고 불러야 하나? 야당은 명실상부한 전국정당화를 위해 호남 색깔을 지우려고 애를 쓴다. 이는 야당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개혁·진보 세력도 동의하는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늘 명분은 개혁·진보를 내세우지만 호남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국 정치인의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겠건만 정치인의 물갈이 대상도 늘 호남에 집중된다. ‘분당 사태’를 대하는 이중성 2003년 민주당 분당 정국에서 진보 언론이 어떤 논조를 폈는지 묵은 신문들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친노 그룹이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을 때, 당시에도 진보 언론은 여당이 분열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가? 정반대였다. 구경만 하거나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당의 주류가 탈당을 막을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2003년의 ‘기획 탈당’의 책임은 주류에게 있는 반면, 주류가 양보만 하면 막을 수 있었던 2015년 탈당의 책임은 탈당파에게 있다는 이중 기준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여당일 땐 분열해도 괜찮지만, 야당일 땐 분열하면 안 된다는 논리인가? 대통령 권력의 후원을 받은 분열은 좋지만, 그렇지 않은 분열은 나쁘다는 뜻인가? 아니면 열린우리당은 마음에 들지만 안철수와 그 일행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런 내용 중심으로 비판해야지, 분열 자체는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논리는 자가당착 아닌가? 아니면, 똑같은 일이라도 내가 하면 개혁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반개혁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독선사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독선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며 상종하길 꺼린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를 대할 땐 특정 당파 집단의 일원이 되거나 익명성을 얻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이념이나 당파성의 옹호자가 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감이나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런 토양에서 정치인이나 논객의 인기는 반대편을 조롱하거나 아프게 만드는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언론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자세로 그런 증오의 언어를 미주알고주알 열심히 보도하는 ‘증오 상업주의’에 탐닉한다. ‘10대 0’의 정치 순수는 독선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룬다. 순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순수를 무기와 명분으로 삼아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간다. 정치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유권자들은 그런 명쾌한 접근법에 환호한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에 등을 돌린 가운데 그런 소수의 전사들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정치권 역시 그런 ‘시장 논리’에 굴복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10대 0’의 정치다. 여야 싸움에서건 같은 당내에서 싸움에서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10, 상대편의 정당성을 0이라고 주장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진실은 7대 3이거나 6대 4이거나 5대 5일 텐데도 언행은 ‘10대 0’에 근거하는 과장과 과격과 극단을 치닫는다. 정치의 종교화로 인한 소통 불능 이념의 종교화는 정치의 종교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종교화된 정치 역시 광신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지만, 그렇게 어두운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놀라운 헌신과 연대와 결집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바로 그런 경우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정치의 종교화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게 과연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절박한 상황이 아닌데도 절박한 열정이나 광신을 갖고 선악 이분법으로 임하다 보면 상대편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정치의 주요 문제는 바로 이런 소통 불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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