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만 태어나는 목소리가 있다
『서로 다른 기념일』 사이토 하루미치의 또 다른 이야기
김연수 소설가, 김원영 변호사 추천!
『목소리 순례』는 농인 사진가 사이토 하루미치가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전작 『서로 다른 기념일』로 서로 다른 감각을 지닌 존재와의 소통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던 저자는 이 책에서 청각장애를 극복하려 했던 어린 시절부터 장애를 인정하고 농인으로 살아가며 접한 다양한 언어와 감각에 대한 내밀한 고백을 전한다. 저자가 찍은 사진과 섬세한 문장이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대화’의 순간을 포착한다.
음성 사회에 고립되어 있던 청각장애 소년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재활하다
저자 사이토 하루미치는 두 살 때 청각장애를 진단받은 뒤 바로 보청기를 끼고 발음훈련을 시작한다. 일반학교에 다니며 ‘듣는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저자가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라 잘 발음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 역시 마음이 담긴 대답이 아닌, 발음에 대한 칭찬이나 조롱뿐이다. 자신에게 들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고 상대가 알아들었는지 표정을 살피며, 저자는 말하면 할수록 타인과 거리가 멀어질 뿐이라고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듣는 사람인 척 스스로를 속이며 고독한 성장기를 보내던 저자의 삶은 고등학교를 농학교로 진학하며 변화한다. 농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농학교에서 ‘보이는 목소리’, 수어와 만난 저자는 비로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진심으로 타인과 대화하게 된다. 농학교에서 지낸 5년 동안 말을 재활한 저자는 스무 살에 보청기를 아예 빼버리고 수어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기 위해 전업사진가의 길로 나아가기로 한다.
다양한 몸과 낯선 존재들을 순례하며 찾은
경계 너머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
사진가가 된 저자는 다양한 몸을 가진 사람을 만나 사진에 담는다. 각자 다른 장애를 지닌 몸을 격렬하게 부딪히는 장애인 레슬러들, 긴 포옹으로 인사하는 다운증후군 당사자, 오직 눈을 깜박여서 대화할 수 있는 ALS 당사자, 자신만의 세계에 살면서도 타인을 향한 걱정과 기쁨을 전할 줄 아는 자폐성 장애인…. 그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소통하려 한다. 저자는 장애와 다른 몸이 경계가 아니라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화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다름을 서로 받아들이면서 관계를 맺기 위해 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눈빛으로 뜻을 전하는 동물과 올곧게 마주 보며 상대를 받아들이는 갓난아기 역시 저자에겐 서로 다른 존재와 대화하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온갖 말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진짜 말을 되찾기 위한 감동적인 여정
기술의 발전으로 장애인이 갈 수 없는 곳을 대신 가주는 로봇이 있고, 휴대폰만으로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혐오와 차별의 말, 피상적인 배려와 경솔한 선의를 담은 말이 넘쳐나고 있다. 청각장애인인 저자가 음성사회의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목소리’와 마주하고 낯선 존재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풍경은 그래서 더욱 깊은 감동을 전한다.
문장에 담기 어려운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한국어판에는 저자의 사진집에 수록되었던 사진들을 내용에 맞춰 추가 수록했다. 사진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각종 상을 수상한 저자의 작품들이 섬세한 글과 어우러져 특별한 소통의 순간을 전한다.
해야 하는 말과 하고 싶은 말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언어를 뛰어넘어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시도할 수 있도록, 이 책이 그 모든 목소리 순례에 적절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