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새벽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어진 국적이다”
끝내 닿을 수 없는 경계에 몸을 던지는 시
시력(詩歷) 39년, 송재학이 새로이 획정한 시의 영토
1986년 『세계의문학』에 「어두운 날짜를 스쳐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4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특유의 시 세계를 단단하게 확립해온 송재학의 열두번째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8번으로 출간되었다. “형이상학에 무심한 시인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감각만의 힘으로 그곳 까지 차고 올라갈 사람”(신형철) “특유의 언어 감각과 조사법을 바탕으로 시적 진술의 이완과 긴장을 동시에 포괄하는 산문시의 새로운 경지”(소월시문학상 심사평)라는 평을 받으며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등 유수의 시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은 신작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시적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한 목발뼈 발배뼈 입방뼈 쐐기뼈라는 순롓길을 짚으면서 스페인을 다녀온 뒤 한동안 비에 젖거나 비를 찾아다닌 꿈이 나를 간섭했습니다 아침마다 복용하는 약병의 라벨을 뜯어내니까 다른 라벨이 숨어 있습니다 문득 내 이름이 지명이거나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짐작을 합니다 [······]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의 미묘한 동작들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습이거나 스페인」 부분
다소 생경하게 읽히는 제목은 도리어 이번 시집을 이해하는 데 귀한 지표가 되어준다. 시인은 ‘습’이라는 정조를 통해 분명한 생과 분명하지 않은 감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며들고 번져가는 시어의 행로를 내면의 여정과 세계를 투영하는 매개로 삼는다. 한편 ‘습’과 등가 관계에 놓인 ‘스페인’은 ‘습’의 상징적 지리이자 언어적 관성의 산물로, 시인의 상상력 안에서 ‘습’의 모서리이자 중심으로 자리한다. 이렇듯 『습이거나 스페인』은 익숙한 세계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감각의 여정 끝에서, 시인이 이룩한 시적 도약의 순간을 보여준다.
방사형으로 활달히 뻗어 나가는 세계의 진폭다성적 선율이 만들어내는 시의 풍경
나무 일기는 말머리성운을 삼킨 날짜와 날씨를 나이테마다 다르게 쓰고 있다 나무의 뒷면은 별의 확장세계, 먼지가 스스로 뭉친 생이라 하지만 그건 오래된 내일이면서 어제의 궁금증이다
―「말머리성운」 부분
송재학의 시에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둔각을 만드는 생물학”(「입의 증식」) “목성 너머 푸른 점”(「가니메데라는 궤도」)과 같은 표현을 필두로 천문학, 기하학, 생물학 등 과학 분과에서 다룰 법한 소재와 개념이 등장한다. 시집의 너른 시야를 염두에 둔다면, “산스크리트어 붓다와 한자어 불체(佛體)에서 부처라는 말이 시작”(「부처」)되는 언어의 변천사에 집중하거나 ‘습’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언어의 역사를 탐구하는 시편(「습이거나 스페인」)을 읽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시적 소재의 활달함이 백과사전적 나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시인은 시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시의 여정”(「지구의 중력」)이나 형상의 사라짐 이후(「가로등이 꺼지면 더딘 불빛은 어디로 가는 걸까」)에 관심을 가지며, 소재의 광대함을 시적 성찰의 깊이와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유해간다. 이러한 다채로운 접근법과 상상력의 확장은,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희우가 시집을 “다수의 선율로 이루어”진 “교향곡의 풍부함”에 비유한 것처럼 시의 세계를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든다. 결국 시집의 너른 시야는 시적 깊이를 단단히 떠받치는 토대로 기능하며, 넓게 펼쳐진 소재와 주제는 서로를 비추고 반사하여 한 편 한 편의 시가 전체 시집 안에서 더 깊고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죽음 너머의 기척에 귀 기울이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 시편들
퇴원하던 날의 밤, 인기척이 나를 깨웠다 어둠과 함께 온 너는 흉흉하고 쭈글쭈글한 회색 안에서 이목구비를 억지로 만들고 있다 텅 비어버린 육신마다 내 병의 후유증을 구겨 넣고 네가 온 걸까 너의 시선은 나를 자꾸 위축시키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수다스러운 날들을 되돌아보니 그곳이 여기보다 더 신산하리라는 헛됨으로 우물쭈물하는 동안 아내가 불을 켜고 너는 없다
―「섬망」 부분
총 3부 58편으로 구성된 시집에 누름돌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정서다. 시인은 생전에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다는 이상의 일화와 시를 인용하며 “자신의 데스마스크를 보는 건 좋은 일일까”(「데스마스크」) 되묻기도 하고, “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생을 반복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가”(「가니메데라는 궤도」)라고 중얼거리며 우주의 거대함에 왜소한 자아를 맞세워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집에 나타나는 정조가 생의 회환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시집의 도정이 끊임없이 스며들고 번져가는 ‘습’의 기운이 어떻게 ‘스페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닿는지를 살피는 일이라면, 시가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시편에 드리운 죽음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시집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란을 감싸려는” 흰색의 눈사람은 후반부 시 「눈사람」에서(“눈에 묻힌 의자/온전히 흰색이 되었어”) 다시 한번 부각된다. “입이나 눈 없이 돌아오리라는 소식과 풍문”을 남긴 ‘눈사람’과 마찬가지로 「흰색」에는 “눈먼 심해어”가 등장한다. 흡사 눈사람의 환생처럼 보이는 “심해어”가 단순한 귀환이나 복귀가 아닌 까닭은 심해어가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겠다는/[······]/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가보지 않은 길을 ‘출발’하려는 설렘을 말하며 ‘끝’이 난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거듭 시작될 수 있음을 형식과 내용 모두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의 표현처럼, “다시 도착하는 새들에 의해 어떤 해변은 끝이 아니라 늘 시작이다”(「해변 b」).
올해로 데뷔 39년을 맞이했음에도, 송재학 시인은 "시 쓰기는 어떤 육체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되풀이"(「시인의 말」)한다고 밝힌다. 오랜 기간 시를 써온 관록과 원숙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기존의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시를 쓰는 존재로서 그 근원을 집요하게 되묻는다. 시인의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로 획정된 시적 영토를 읽는 일은, 그러므로 시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깊은 울림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