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한 대국과 온 백성의 행복 중
어느 쪽이 더 급박했고, 중요했던가?”
당대 최고의 역사가 3인을 한자리로 불러
오늘날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한나라 무제의 본모습을 따져 밝히다!
중국의 최대 방송사(중국중앙텔레비전, CCTV)의 인문 강연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에서 일약 화제가 된 한무제에 관한 30개 강연이 책으로 정리됐다.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치르는 이중톈, 왕리췬 등의 학자 출신 스타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강연을 맡은 젊은 역사학자는 정설로 되어 있던 한나라 무제의 역사 평가를 원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기염을 토한다. 왜 하필 한무제인가? 한무제는 중국에서 ‘진황한무’로 불리며, 진시황과 함께 불세출의 인물로 평가받는 제왕이자, 중화제국의 기초를 닦은 영웅이기 때문이다.
한무제의 업적과 일생은 16글자로 압축 정리할 수 있다. ‘내강황권內强皇權(안으로 황권을 강화하고), 외복사이外服四夷(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복종시켰다), 미신신선迷信神仙(미신과 신선을 숭배하며), 만년개철晩年改轍(만년에 종래의 정책을 철회했다)’이 그것이다.
16자로 요약된 한무제의 행보는 많은 사람에게 익히 알려졌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하나하나 되묻는다. 먼저 한무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저자가 취한 방법은 사마천, 반고, 사마광을 한자리로 불러모은 것. 당대 최고의 사가인 그들이 쓴 《사기》, 《한서》, 《자치통감》을 단서로 삼았다. 단편적인 사건과 기록 뒤에 숨겨진 배경을 살펴보고, 생략되고 빠진 사실을 이어붙여 맥락을 찾는다. 여정은 흥미진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 책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한무제는 이제껏 알던 제왕이 아니다. 저간의 사건은 재구성된다. 사마천, 반고, 사마광의 기록을 분석하여 종합하면 한무제는 혼군(昏君)이자 명군(名君)이며 폭군(暴君)의 얼굴을 모두 하고 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안으로 황권을 강화했다는 업적에 관해
한무제 원수 원년(BC. 112)에 <회남자>의 저자인 회남왕 유안이 모반죄로 고발돼 자살하고 만다. 한데 이 사건의 성격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진실은 뭘까?
유안의 모반 사건은 원통한 일이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한무제인 것. 유안은 단지 희생양이었다. 《사기》에는 유안의 심성을 알아볼 수 있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회남왕 유안은 사람됨이 독서와 거문고 연주를 좋아하고 활을 쏘며 사냥하거나 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음덕을 행해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자기 이름이 천하에 퍼뜨리려고 했다.
이렇게 심성이 착하고 백성을 사랑한 제후왕은 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해야 했을까? 제후왕으로서 격조가 드높고 평가가 후한 것은 당시에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쉽게 황제의 질투를 일으키고 중앙정부를 불안하게 할 요소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의 질투심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무제가 질투를 일으킨 것은 유안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한무제의 이복형인 유덕은 당시 하간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유덕 또한 평판이 아주 좋았다. 문화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단절된 유학의 경전을 새로 정리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유덕은 이 때문에 한무제에게 질투를 받았다.
한번은 한무제가 유덕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탕湯은 70리의 땅에서 왕자가 됐고, 문왕文王은 백 리의 땅에서 왕자가 됐다.” 이 말은 한무제가 유덕에게 백성에게 인의를 베풀고 나중에 백성의 인기를 얻으면 내 황위까지 넘볼 것이냐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은 유덕은 다시는 문화 사업을 하지 않고 백성에게 인의를 베풀지 않았으며 주색에 빠져서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위기후 두영과 무안군 전분은 모두 한무제 초기에 승상 직을 맡은 인물들인데, 회남왕 유안처럼 문객을 양성하는 것을 좋아해 주위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세력이 강대해지자 한무제는 큰 위협을 느끼고 안정감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무제는 이를 갈 정도로 몹시 분개했으며.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위청과 곽거병 같은 대장군은 한무제 곁에서 늘 그런 모습을 보아온 터라 자신들에게 화근이 될 문객을 양성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유안을 비롯한 제후들과 승상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 유협이던 곽해 같은 유협들까지도 황권을 강화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판단에 무차별하게 제거했다.
유학자들과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한무제를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바로 한무제가 즉위 초에 저명한 유학자인 동중서의 의견에 따라 기타 학파의 학설을 버리고, 오직 유학의 학설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무제 시대에 통치 사상의 하나로 선택돼 발전한 유학을 두고 세 사학자는 견해를 서로 달리했다.
사마천은 먼저 한무제가 유가의 표준을 따른 군주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금 천자(한무제)가 즉위하자마자 더욱 공손히 귀신에게 지내고 받들었다.”고 교묘하게 써내려갔다. 더불어 《사기》〈봉선서〉에도 한무제가 신선과 미신을 신봉했다는 사적을 많이 기록했다.
《사기》〈유림열전〉에서 사마천은 이상하게도 오직 관직명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일종의 우려였다. 그는 아마도 “유학이 권력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도 순수하고 올바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학자로서 자기 소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다른 곳에서 “진정한 유학자는 어떻게 자기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유학의 가치관은 어땠는가?”에 관해 기술했다. 바로 《사기》의 〈공자세가〉다. 사마천의 붓 아래에 공자는 자기만의 사상을 전파하려고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풍상고초를 겪었고, 어떤 통치자를 맞닥뜨리거나 어떤 시련이 닥쳐도 자기 소신을 꺾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매진했다. 그 제자들도 비록 서로 다른 성격과 처세관을 지녔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속의 공명, 벼슬, 그리고 재물 앞에서 자기 소신을 꺾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기》에서 묘사된 진정한 유학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유학자들의 표준에서 당시 승상이었던 공손홍을 재보면 그는 바른 학문과 양심을 지니지 못했고, 단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힘껏 아부해 운이 좋게 벼락출세한 사례에 해당한다.
반고는 사마천과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적인 유가 학자로서 한무제를 치켜세웠고, 유학을 수호하려는 견해를 밝혔다. 반고는 “효무제孝武帝(한무제)는 즉위하자마자 탁월하게 백가百家를 폐출하고, 육경六經을 드러냈다.”고 찬미하며, 한무제를 유학을 보호하는 영명한 군주로 그렸다.
사마광의 태도는 두 사학자와 또 달랐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동중서를 한무제 시대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로 안배한 뒤 동중서의 입을 빌려 유학의 정치강령을 수립하고, 그 뒤에 한무제가 저지른 행동은 유학의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한마디로 한무제가 유가의 관념에 부합하는 군주가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사마광은 그저 한무제를 유학을 정치무대나 역사무대로 끌어올린 인도자 정도로 인식했다.
한편 한무제 통치하의 승상은 무능한 인물 일색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무제는 공손홍, 석경같이 황권에 절대복종하는 귀속된 승상을 필요로 했다. 이들은 유사시에는 희생양이나 정적의 희생물이 됐다. 한무제에게 승상은 황권 강화를 위해 미리 계획된 과정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다.
▷ 사방의 오랑캐를 복종시켰다는 업적에 관해
《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쪽으로 안식국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갈석산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 낙랑과 현토군을 설치했다. 북쪽으로 흉노를 만 리 밖으로 내쫓고, 그곳에 영루와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해에 8개의 군을 만들었다.”
안식국은 오늘날의 이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