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퓰리처상 수상 작가
20세기 미국 문학을 개척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1954)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비롯하여 『무기여 잘 있어라(A Farewell to Arms)』,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현대 문학의 개척자라 불리는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길 잃은 세대’(une g?n?ration perdue, lost generation)’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동안 저작권 계약이 어려워,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다가 이번에 대표작 세 권을 동시에 선보이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로, 작가 고유의 소설 수법과 실존 철학이 짧은 분량 안에 집약돼 있는 『노인과 바다』, 그 스스로 “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밝힌 연애소설이자 깊은 존재론적 성찰을 담은 『무기여 잘 있어라』, 세계대전 후 삶의 방향을 상실한 사람들을 그린 첫 번째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세 권이다.
이는 또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한국외대 영어 통번역학과) 교수가 지난 3년간 준비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과 같아서 8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수면에 떠 있고 나머지 8분의 7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욱동 교수는 2009년부터 번역을 해 오면서 이러한 문체적 특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는 간결한 표현 속에 다양한 의미를 숨겨 둔 헤밍웨이의 문장 하나하나를 여러 각도로 고민하여 그 어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려고 애썼다. 또한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그대로 노출해 지역적 특징을 드러낸 부분도 원문 그대로, 그러나 그 의도와 느낌은 해치지 않도록 하는 데도 노력했다. 쿠바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지명과 어업, 전쟁, 투우 등에 사용되는 용어들도 하나하나 조사하여 실어 주었다. 김욱동 교수는 “이 번역서들에서 헤밍웨이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영혼을 살려 내고 싶었다. 지시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축적 의미까지 옮기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행간의 숨은 뜻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라고 헤밍웨이 번역 과정의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 『무기여 잘 있어라』
전쟁의 허무 속에서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가는 청년의 이야기
전쟁소설과 연애소설의 한계를 넘어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낸 명작
이탈리아 로마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미국 청년 프레더릭 헨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앰뷸런스 부대의 장교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실제 전투와는 무관한 생활을 하던 프레더릭은 영국 출신의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알게 된다. 그는 처음에 위안소에서 여자를 만나는 것보다 낫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캐서린과 만난다. 그러다 부상을 입고 밀라노의 후방 병원에 입원해 그곳으로 온 캐서린의 간호를 받게 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급속도로 깊어진다. 프레더릭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캐서린과 함께 삼 주간 요양 휴가를 떠날 생각이었으나,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수간호사에게 약점을 잡혀 다시 전선으로 차출된다. 전투에서 연합군이 대패해 퇴각하던 중 탈영과 간첩 혐의로 아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프레더릭은 강물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그는 밀라노로 돌아가 캐서린과 재회하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서 출산을 기다리며 잠깐 동안 평온한 행복을 누리지만, 결국 비극적인 이별을 맞게 된다.
『무기여 잘 있어라』는 대표적인 전쟁소설답게 전장과 후방의 대조적인 상황, 전쟁에 임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생각 등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작품 곳곳에 짙게 깔려 있다. 미국인이면서 이탈리아 부대에 소속되어 있고, 전투 부대가 아니라 앰뷸런스 부대에 소속된 프레더릭은 애초에 자신이 겪는 전쟁이 “영화 속의 전쟁만큼이나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식사 중에 포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도 훈장을 받고, 적군이 아닌 겁먹은 아군의 총에 후임병을 잃고, 퇴각 중 아군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목으로 헌병에게 붙잡혀 탈영 및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될 위기에 놓이면서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 스스로 단독 강화조약을 맺는다. 치열한 전투 대신 비참한 퇴각 상황과 개개인의 심리를 묘사해 더욱 효과적으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헤밍웨이 스스로 “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만큼 애잔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저 놀이처럼 시작된 프레더릭과 캐서린의 관계는 시련 속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고전적인 비극에서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이별을 맞게 된다. 애틋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가운데 사랑을 믿지 않던 프레더릭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만큼 캐서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전쟁소설이나 연애소설에서 그치지 않고, 깊은 존재론적 성찰을 다룬다. 자기 삶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던 프레더릭은 비참한 전장에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며 추상적인 관념의 공허함과 세상에 내던져져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용기를 갖고 오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꺾기 위해 죽여야 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뜨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 부러진 곳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만다. 아주 선량한 사람들이든, 아주 부드러운 사람들이든,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든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죽인다.(『무기여 잘 있어라』 중에서)
원제 ‘A Farewell to Arms’의 ‘Arms’는 무기를 뜻하기도 하고, 두 팔을 뜻하기도 한다. 결국 주인공은 단독 강화조약으로 전쟁(무기)에 안녕을 고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의 두 팔에도 안녕을 고함으로써 삶의 본질과 사랑의 가치를 통감하는 것이다. 전쟁의 허무 속에서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가는 한 청년의 애절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지금도 연극, 영화, 드라마 등으로 거듭 제작되고 있으며, 전 세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는 그동안 국내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표기해 온 제목을 현행 맞춤법에 따라 ‘무기여 잘 있어라’로 바로잡았다.
권혜정
3.5
책에서처럼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을까...
양현우
읽고싶어요
이거 박상민이 쓴 책인가요?
나오지
4.5
전쟁의 권태를 표현하기에 완벽한 문체.
영화.다큐.OTT.책.많이보고읽자
3.0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이울리나"를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또다른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책을 빌려서 봤는데.. 종이울리나에 비해서 많이떨어진다..ㅠㅜ 좀 아쉬웠다
홍준영
4.0
스코세이지의 마침표. . “겨울이 시작되자 장마가 찾아왔고 장마와 더불어 콜레라가 퍼졌다. 하지만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은 막았고, 결과적으로 군대에서는 겨우 칠천 명의 희생자가 나왔을 뿐이다.”(13쪽) 헤밍웨이의 문장은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삼십 쪽에 걸쳐 세세히 묘사했을 내용이 단 두 줄로 압축된다. 이 간결한 시구의 공백을 채우는 건 이제 읽는 이의 몫이다. 인권이 중지된 전쟁터에서 군대는 어떻게 전염을 막았을까. 습기를 머금어 끈적끈적한 공기와 흥건한 토사물로 범벅이 된 진흙 속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었을까. 칠천 명의 희생이 ‘겨우’로 수식되는 이곳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몇 명의 넋이 스러지는 걸까. 헤밍웨이는 이렇듯 손쉽게 읽는 이를 1차 세계대전기 이탈리아로 안내한다. . 단어를 최소한 절약하는 이런 스타일은 작품이 전투 대목에 이를 때마다 글을 건조하게 한다. 1부를 마무리하는 포격전 대목에서 작가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특히 압권이다. “얼마 뒤 머리 위 들것에서 떨어지는 피가 줄어들더니 또다시 처음처럼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쪽 들것에 누워 있는 환자가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면서 캔버스 포장이 움직이는 소리와 감촉이 느껴졌다. ‘그 환자는 어떻습니까? 이제 거의 다 왔거든요.’ 영국병이 뒤를 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제 죽은 것 같은데.’ 내가 대답했다. 핏방울은 겨울철 해가 진 뒤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주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졌다. 차가 언덕길을 올라가는 동안 차 안은 밤이라 추웠다. 언덕 꼭대기 주둔지에서 위생병들이 그 들것을 밖으로 끌어내고 대신 다른 들것을 실은 다음 우리는 계속해서 달렸다.”(104쪽) . 104쪽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간결한 문장이 극한 상황을 만나면 소설은 항상 대상과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전쟁을 미화하지도 인간을 예찬하지도 않는 이 관찰자적 구도는 다시 필연적으로 염세와 회의로 나아간다. 이런 주제와 형식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갱스터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좋은 친구들(1990), 갱스 오브 뉴욕(2002), 디파티드(2006), 아이리시맨(2019) 같은 작품에서 스코세이지는 대사를 짧게 하고 화면은 가만히 둔다. 주인공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결정적 순간에서조차 그는 음악을 깔거나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담배 연기와 총성으로 가득한 상영시간이 끝나면 관객은 갱단이나 인간이 멋있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의미 있는 주제는 생존 하나다. 의리니 정의니 하는 달달한 말들은 죽은 자와 함께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 ‘무기여 잘 있어라’의 주인공 프레데릭도 스코세이지의 시선에서 전쟁을 경험한다. 미국인인데도 이탈리아 전선에 자원했던 그는 (소설에서는 정확히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분명 무언가를 신봉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스코세이지를 따라 신성이니 영광이니 하는 달달한 말들을 강물로 던져버린다.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290쪽) .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려주겠다는 쿠르베의 선언이 1차대전의 포탄을 맞고 베이컨의 고깃덩어리로 일그러진다. 캔버스는 이제 신성과 영광을 모사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질감을 표현할 물질이 된다. 헤밍웨이도 자신의 소설을 고깃덩어리로 만든다. 그는 관념을 모사하기를 멈춘다. “나는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음식을 먹도록 태어났다. 정말 그렇다. 먹고 마시고 캐서린과 잠을 자도록 만들어졌다.”(362쪽) 대신 프레데릭이 온갖 음식을 먹는 모습, 맥주와 포도주와 별의별 음료를 마시는 모습, 그리고 캐서린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만 집요하게(그리고 여전히 건조하게) 그린다. 캐서린이 산부인과에서 생사를 오가는 한나절 동안에도 프레데릭은 계속 식당을 오가며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인간에게 허락된 영역은 거기까지라고 선언하기라도 하는 듯이. . 때문에 ‘무기여 잘 있어라’에서는 문학적 계보를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는 호손도 멜빌도 트웨인도 없다. 19세기 유럽 문학의 중후한 관념이나 섬세한 문장도 없다. 성경도 셰익스피어도 세르반테스도 없다. ‘무기여 잘 있어라’에는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산부인과에서의 죽음, 그 사이의 허무한 삶을 사는 한 사람만 있다. 트웨인과 타란티노 감독도 문학적 조상을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경우에 읽는 이는 ‘무언가가 거부당하고 있다’라는 사실만큼은 간파할 수 있었다. 작가 자신이 그런 거부를 유희 삼으면서 텍스트와 화면 곳곳에 단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밍웨이와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제 문학적 조상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읽는 이는 작품을 맨바닥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작가라는 헤밍웨이의 별칭은 이런 차원에서 참으로 적절하다. . 그래서인지 ‘무기여 잘 있어라’를 읽을 때는 작품의 뿌리를 찾거나 의미의 복층을 해부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소설 자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럴 때는 소설에서 서로 대응되는 부분을 찾는 작업이 감상에 도움을 준다.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다, 라는 말?’ ‘네. 누가 한 말이죠?’ ‘모르겠어.’ ‘그 사람은 아마 비겁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비겁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만 용감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용감한 사람이 영리하다면 아마 이천 번은 죽을 거예요.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죠.’”(222쪽) “‘걱정하지 마요, 자기. 나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이건 비열한 장난일 뿐이에요.’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은 사랑스럽고 용감한 여자야.’ (중략) 그녀는 줄곧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502쪽) 가령 이 두 대목은 서로 만나 캐서린이 난산의 고통을 겪으며 수도 없이 죽음을 체험했음을, 그럼에도 용감하게 끝까지 침묵을 지키면서 진짜 죽음을 맞았음을 암시한다. . 이렇게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대목은 수도 없이 많다. 삶의 허무를 깨달은 군종신부를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 변화, 주인공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착각하는 이발사와 아군에게 오인사격을 가하는 이탈리아군 등이 그 예시이고 옮긴이도 이러한 접근법에 착안하여 몇몇 발견을 공유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시선을 끈 건 다음과 같은 장면의 대구이다. “‘명령이다. 차로 돌아와서 나뭇가지를 꺾어 와.’ 내가 명령했다. 그러자 하사관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린 가야 됩니다. 조금 있으면 길이 차단되고 맙니다. 중위님은 우리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 직속상관이 아니잖아요.’ (중략) 나는 연이어 세 발을 발사해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318쪽) “‘야만인들이 이 신성한 조국 땅을 짓밟은 것은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 때문이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중령이 물었다. ‘우리가 승리의 결실을 잃게 된 것은 당신 같은 사람들의 반역 행위 때문이란 말이오.’ ‘후퇴해 본 경험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이탈리아군은 결코 후퇴하지 않소.’ (중략) ‘부대 이탈 죄로 총살에 처함!’ 그 장교가 말했다.”(348쪽) . 전쟁 앞에서는 군인과 군대도 군법에조차 기댈 수 없다. ‘디파티드’에서도 ‘아이리시맨’에서도 인물들을 보호해주는 규칙은 없다. 아무리 그럴듯한 옷을(군복이든, 마피아 양복이든) 입고 그럴싸한 법칙을 꾸며내도 포화가 걷히면 인간은 덫에 걸린 시체일 뿐이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죽음의 명제는 굳이 전쟁을 통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엄습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이 인간 실존의 비극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 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496쪽) . 그래서 작품의 주제는 결국 ‘인간은 죽는다’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 주제는 매우 새로운 것이다. 이전의 작품들은 결코 ‘인간은 죽는다’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인간은 죽는다, 그래서 인간은 신과 같아질 수 있다, 라고 덧붙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인간은 죽는다, 그러니 어떻게 살지 고민해야만 한다, 라고 덧붙였다. ‘무기여 잘 있어라’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앙드레 말로가 남긴 걸작인 ‘인간의 조건’에서조차 인간은 죽는다, 뒤에 그러나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라고 덧붙여진 주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정말로 ‘인간은 죽는다’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주제를 다른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도, 이 주제에서 진리나 아름다움을 이끌어낼 필요도 없다. 읽는 이는 전우들을 하나둘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캐서린과 아기마저 잃어버린 프레데릭처럼 이 주제를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디파티드’의 결말에서처럼 씁쓸한 소주의 뒷맛이 목구멍에 걸리는 듯하다. 담배를 씹어먹은 것처럼 가슴이 헛헛해지게 하는 멋진 소설이다. . +문장이 정말 근사하다.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이야기의 여백이 읽는 이의 상상력을 많이 요구한다. 퍼거슨은 주인공을 좋아한 걸까? 보넬로는 정말 도망쳤을까 아니면 피아니가 죽인 걸까? 바텐더는 왜 순순히 보트를 내줬을까? 피어오르는 질문들에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느라 술술 읽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 멈춰서야 했다. 헤밍웨이의 책을 더 읽고 싶다. . +대사는 더 근사하다. 초반부에 군종신부와 장교들이 식당에서 나누는 대화, 후반부에 호텔에서 주인공과 그레피 백작이 나누는 대화는 마법을 건 것처럼 읽는 이를 홀린다. 짧고 투박한 대사에서 왜 이렇게 멋이 풍기는지 모르겠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선택받은 사람들만 글을 쓰고 영화를 찍나 보다.
상맹
3.5
이 기나긴 전쟁 이야기에서 죽다 살아 돌아온 주인공이 결국 결말에서 마지막으로 죽는 걸 보는 게 사랑하는 산모라니.
이대해
3.0
젊어서 못읽은 세계문학을 읽는 중. 아직도 많이 남았네,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헤밍웨이는 도대체 왜 읽지 않은거야. 생활이 곧바로 소설이 된 경우이다. 헤밍웨이 1차 세계대전 참전, 부상과 영국인 간호사와의 연애. 그것이 곧바로 소설로 탄생. 30세 때 쓴 소설이라한다. 당연히 사고의 깊이는 얕다. 단한가지. 그의 하드보일드 문체 즉, 간결한 문체가 돋보인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상이 잘 녹아 있다. 이때만 해도 정말로 루카치가 말 했던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갈수 있었던 시대>였구나.
하늘
3.5
재밌는 건 아닌데 언젠가 또 읽고 싶을 것 같은 책, 12, 1월 어두운 새벽 같은 책이었다. 영화 1917과 분위기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캐서린이 전쟁 속 고통을 겪은 주인공이 느끼고 싶은 안정감, 애정을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아서 뭔가 꺼림직했다. 캐서린이 너무 주인공의 행복만을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 같았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사람인척하는 기계+수동적이고 주인이 원하는 대답과 행동만 뱉어내는 느낌? 겨울마다 생각날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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