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시인선〉 027. 2011년 계간 『시안』을 통해 등단한 안태현 시인의 첫 시집. 안태현의 시는 남성성 속에 내재한 여성성의 구현을 통해 역동적인 동물성보다는 식물적 상상력을 선보이며, 분열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부드러움을 지향한다. 모계로 이어지는 유전 속에 녹아든 사랑의 실체를 규명하며 개별 존재의 소외와 단절을 끊임없이 거부한다. 시인이 파괴적이며 잔혹한 남성성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모성성의 회복을 표명하는 것은 순응, 위로, 나눔, 포용, 조화, 공존 등의 가치를 모성적 여성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질박한 마음과 모성의 젖줄로 척박한 세상에 생명과 사랑을 스미게 하는 그의 노래는 비정한 현실과 차가운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의 세태를 환기하며 진정 우리가 갈구해야 할 것이 무언지를 묻는다.
[출판사 서평]
‘늙음’과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것은 슬픔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 형상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안태현은 늙음과 죽음을 가장 자연스러운 순환의 결과물로 받아들인다.
뒷짐 지는 걸 아내가 한사코 말리는 까닭은/늙은 냄새나는 남편이 싫다는 거겠지만/사람이 신록처럼 들이치고/어둠이 꽃처럼 피는 길을 걷다보면/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는 것이다//활갯짓에 밀려나/뒷덜미에 매달려 있던 늙음이/등허리에 쏟아져 내려/느린 걸음과 걸음 사이/나도 모르게 받아 업는 시늉을 해보는 것이다 ―「뒷짐」 부분
늙음은 불현듯 닥친다. 자각보다 앞서 늙음의 시간이 온다. “나도 모르게” “느린 걸음”을 걷고, 어느새 “뒷덜미에 매달려 있”는 “등허리에 쏟아져 내”리는 “늙음”을 본다. “신록”의 푸름을 버리고, “활갯짓”의 역동성을 상실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슬프다. 아내는 투정처럼 “뒷짐 지는 걸” “한사코 말리”지만, “뒷짐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를 받아들여야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늙음은 의식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 그저 받아들여야하는 숙명의 과정이다. 시인은 늙음을 혐오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받아 없는 시늉을” 하면서 늙음을 껴안는다. 이는 옹호의 의지도 타협의 방식도 아니다. 변화하는 자연의 시간에 화자는 기꺼이 순응한다. 자연의 일부인 몸의 쇠퇴를 방어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려는 행위 이면에는 겸허한 세계 인식이 자리한다. 존재의 시간이란 부재로 흘러가는 시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가 허허벌판/조등 하나 걸리지 않은 상가(喪家)에서 맞는 저녁입니다/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걸음을 멈춘/이승의 마지막 발자국을 감추고 싶다는 듯이/함박눈은 내리고/이 세상 어딘가에 두고 온 것들이 많은/저마다의 마음들은/먼 바다 건너 불빛을 좇아 뭍으로만 흘러갑니다/뱃길이 끊어질까/깊어가는 걱정에 눈발이 멈칫하기도 하지만/주먹밥 한 덩이/뜨끈한 파랫국 한 사발에 속을 데우며/몸이거나 영혼이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합니다 ―「바닷가 장례식」 부분
“바닷가 허허벌판/조등 하나 걸리지 않은 상가(喪家)”의 풍경은 외롭고 고독한 풍경이다. “이승의 마지막 발자국”을 하나씩 지우는 “함박눈”만이 떠나가는 영혼 위에 떨어진다. 이승을 떠나는 존재를 잊지 못하는 “저마다의 마음들”은 “뭍으로만” 향하지만, 존재의 죽음은 뭍으로 향하지 못한다. 다만 기억과 생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자의 걱정과 염려는 “주먹밥 한 덩이” “뜨끈한 파랫국 한 사발”로 “속을 데우며” 죽은 자를 추모할 뿐이다. 눈발이 날리는 바닷가 장례식장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의 제의이다. 삶으로 다시 회귀할 수 없는 죽음은 떠나가고 흘러간다. 하지만 자연의 공간 속에 날리는 천상의 눈발은 죽음을 어둠이 아닌 축복의 방식으로 어루만진다. 체온을 잃은 차가운 육체와 영혼에게 자연은 한없이 풍요로운 진혼곡을 바친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문제는 그 사건에 대한 수용 태도이다. 안태현은 ‘죽음의 사건’을 자연의 변화처럼 지극히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창가에서는/나무들이 울고 있다/우리도 언젠가는 상복으로 갈아입고/작은 새들처럼/부리를 맞대며/울음을 나누는 저녁이 온다 ―「시몬, 너는 좋으냐」 부분
태양의 시간이 존재하듯이 일몰의 시간도 존재한다.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 지나면 “울음을 나누는 저녁”이 찾아온다. 빛의 시간 뒤에 어둠이 머물고, 내일의 시간 속에는 죽음의 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렇듯 죽음은 하나의 둥근 시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상복으로 갈아입고”라는 말처럼 죽음은 삶의 의복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저무는 시간이다. 나무와 새의 울음은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는 울음이기도 하지만, 사라지는 것을 위로하는 울음이기도 하다. “작은 새들처럼/부리를 맞대며/울음을 나누는”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따뜻한 시간이다.
후생에 다시 만나고 싶으냔 그대 물음에/아직 답을 주지 못했는데/비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언덕을 지나/돌고 도는 길/골똘하게 물레질 하던 어머니 곁에서/아주 먼 곳까지 이어지던 꿈길처럼/그대와 다시 걸을 수 있을까 ―「둘레길」 부분
“물레질”은 “돌고 도는 길”을 형상화한다. 이승의 시간과 저승의 시간은 돌고 도는 물레처럼 둥근 원(圓)의 시간이다. “그대”와 “나”는 이승의 시간에서 마주쳤고 다시 저승의 시간 속에서 조우한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언덕을 지나”는 순탄치 않는 질곡의 시간을 지나면 “아주 먼 곳까지 이어지는 꿈결처럼” 어머니와 그대와의 만남이 찾아온다.
안태현에게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이별인 동시에 만남의 시간이다. 이승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저승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순환처럼 인간의 시간 또한 직선적 시간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획하지 않는 순환론적 시간 의식은 안태현의 동양적 자연관을 드러낸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닌 일원론적 세계관은 삶과 죽음을 연속적 차원으로 파악하려는 자기 정체의 지속감을 일깨워준다. 이는 안태현의 자연적 원형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안태현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극과 초월의 시각으로 보려는 선적 관념론에 기대어 있지 않다. 오히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삶의 순리가 닮아 있다는 동질적 세계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실적 자연과 닮아 있다. 자연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기꺼이 생명의 밑거름이 된다. 자연의 희생과 나눔은 공존을 위한 것이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태현은 자연을 닮으려는 순수한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안태현의 시의 중심에는 위로와 나눔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위로와 나눔은 삶의 현장과 죽음의 시간을 넘나들며 어디든 존재한다. 특히 따뜻한 아니마의 세계에 연결된 모성성의 회복을 통해 자연을 배우는 포용의 그릇을 빚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