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멋대로 시작해 버린 것처럼
나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다
처음은 그러하다
가장 엉성하며 의뭉스럽고 불분명하다
갑자기 무주로 이사 가게 된 어린 시절의 경진이는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모, 하나뿐인 자매,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모든 게 제멋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경진이는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것이 있을까?’ 칠이 벗겨진 정글짐.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 슬쩍 손을 대면 녹물이 흐르는 그네. ―본문 21면
어느 멋진 영화에서처럼 자신을 구해 주는 왕자님도 없고 소위 말하는 ‘베스트 프렌드’도 없는 고요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경진이는 칭찬받기 위해 일기장과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마법처럼 글에 재능을 찾아 행복해졌다는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테지만 시인은 곧바로 자라지 않는다.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언제나처럼 넘어지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린다. 나 자신이 되는 것조차 힘겹다고 생각할 무렵 시인은 깨닫는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항상 옆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이소호 시인은 자신의 처음이 불분명하고 의뭉스러웠다고 말한다. 그 생각은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시인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는 그 솔직함이 지금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위로가 되어 준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기, 여기에 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진’이를 보고 ‘소호’를 볼 것이다. 부디 당신의 삶에 겹쳐 보았을 때 다르지 않길 바란다. ―본문 10면
미워했던 나와 진심으로 화해하는 힘
생각해 보니 처음은 멋질 필요가 없다
흔히들 성장은 계단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해진 길을 차근차근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에 접어든 이소호 시인이 말하듯, 어른이 되면 펼쳐질 줄 알았던 그럴듯한 계단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성장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우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펼친 독자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시인의 에피소드에 울고 웃다 마침내 그토록 미워했던 자신과 화해하는 한 사람을 볼 것이다. 그리고 엉성하게 써 내려간 첫 줄에도 진정으로 웃는 법을 시인과 함께 깨달으며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엄마, 있잖아. 내가 여기서 더 자라면 무엇이 될까?”
“네가 아무리 자라도 우리 소호는 엄마 눈에 여전히 아기지.”
(…)
역시 사람은 너무나 쉽게 변하거나, 그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영원히 고쳐 쓰이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변하는 것은 매일매일 내 손으로 쓰는 나 자신뿐이다. ―본문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