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참전군인이었다”
1968년 그날, 베트남의 기억에 다가가다
할아버지의 침묵에서부터 시작된
영화 〈기억의 전쟁〉 제작진의 5년여의 여정
참전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해 베트남 중부의 수많은 증오비와 위령비를 지나 비석 너머의 이야기에 닿기까지, 그리고 50년 넘게 그 이야기를 품어온 ‘사람’을 만나기까지 영화 〈기억의 전쟁〉 제작팀이 걸어온 5년여의 여정을 책에 담았다. 영화 〈기억의 전쟁〉이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베트남 중부 마을의 ‘따이한(??i H?n, 大韓) 제사’와 한국의 베트남전쟁 전몰장병 위령제, 베트남 전쟁증적박물관과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 “내가 똑똑히 봤어. 한국군이었어”라는 피해자의 증언과 “양민 학살은 없었다”고 외치는 참전군인의 증언을 오가며 서로 충돌하는 기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책 『기억의 전쟁』은 그 충돌 지점에서 카메라를 든 이들이 매순간 직면해야 했던 고민들을 보여준다.
이길보라 감독이 〈기억의 전쟁〉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서로 다른 침묵을 이해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도, ‘이혼비’를 벌기 위해 베트남에 간 남편 대신 전장에서 보내온 돈으로 가족을 건사한 할머니로부터도 전쟁에 대해 들을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길보라 감독은 스스로 베트남의 기억에 다가서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한강의 기적으로, 가족들에게는 초콜렛과 산요 카세트로, ‘풍요와 발전’의 서사 안에 매끄럽게 통합되는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기억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1968년에 일어났던 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궁리했던 과정은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건너오며 부딪쳤던 부조리와 불합리를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는 이길보라 감독의 고백은 개인의 서사에서부터 출발해 전쟁과 학살, 국가 폭력의 문제에 다가서려는 이 긴 여정의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고엽제 후유증은 할아버지에게 암과 함께 상패도 남겼다. 할아버지는 후유증을 인정받아 받은 상패를 대통령 표창장과 나란히 집 한가운데에 진열했다. 먼지가 앉을 새라 수건으로 정성껏 닦곤 했는데 … 할머니는 그래도 나라에서 상이군인으로 인정해주어 수당도 나오고 보훈병원에 다닐 수 있는 거라며, 그게 ‘혜택’이라며 병원에 갈 짐을 쌌다.”(12쪽)
“카메라를 내려놓은 곳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되었다”
베트남 중부의 증오비와 위령비를 지나
비석 너머의 이야기에 가닿기까지
2015년 겨울, 평화기행과 빈안 학살 49주기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베트남에 도착한 제작진이 마주한 것은 베트남 중부 마을 곳곳에 자리한 위령비와 증오비였다. 그곳에서 “증오가 형상을 가지고 있는” 듯한 비석과 그 위에 적힌 비문, 그리고 학살 희생자들의 이름 혹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보자인(Vo Danh, ‘무명’이라는 뜻의 베트남어)’을 눈에 새긴다. 제작진은 먼저 카메라를 내려놓기를 택한다. 대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고, 마을 사람들이 나눠주는 독한 술을 받아 마신다. 촬영감독인 곽소진은 이러한 결정이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이기 이전에 학살지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내 마음이 완전히 손상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준 배려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을 촬영하지 않을 권리, 고통의 내부에 있는 사람을 촬영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하미 마을에 가면 학살 당시 희생된 마을 주민 135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의 비문이 연꽃 문양 대리석 아래 감춰져 있다.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가 학살 당시 상황을 묘사한 비문의 내용을 문제 삼자 마을 주민들이 비문을 삭제하는 대신 덧씌우기를 택한 것이다. 제작진은 “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보이지 않도록 가려두는 마음”이 여전히 한쪽의 기억을 지배하는 ‘기억의 전쟁’ 한복판에서, 촬영을 한다는 건 카메라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감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용서받고 싶은 사람과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잊고 살 수 있는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사람, 일상을 비집고 들어간 사람과 그들이 떠난 뒤에도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조심스럽게 실현해나가는 제작진의 행보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무거운 사건 앞에서 피해자 역시 일상을 사는 사람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실”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든 동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작팀은 혹시나 모르는 마음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지만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다. 대신 꽃과 향을 올리고, 절을 하고, 위령비에 새겨진 읽을 수 없는 이름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들판에 부는 바람을 찍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63쪽)
“아무리 자세히 듣는다 해도
나는 그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비非남성의 시선으로
전쟁과 학살을 마주한다는 것
프로덕션 기간 내내 제작진은 음력설이면 베트남을 찾았다. 1968년 ‘구정 대공세’라고 불린 대규모 군사 작전이 있었고, 이 시기에 특히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서 민간인 학살이 많이 벌어졌다. 설 연휴를 전후로 학살을 당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와 제사가 연이어 열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듀서 서새롬은 제사 음식을 함께 준비하고, 향과 절을 올리고, 제삿밥을 나눠먹고, 그 사이사이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를 “기억을 함께하는 일”로, 프로덕션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딘껌, 응우옌럽, 응우옌티탄 세 명 증언자들의 학살 당시 경험에 주목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거나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영화의 미덕은 어쩌면 그런 노력 덕분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통역사 응우옌응옥뚜옌이 이 책의 부록에서 지적한 것처럼 “등장인물들은 슬픈 기억을 되짚으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듯 증언”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책에 실린 영화에 대한 해제 글에서 영화의 영어 제목인 ‘언톨드Untold’를 코다(CODA,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 정체성을 가진 감독의 세계와 말을 빼앗긴 여성화된 타자의 세계가 만나는 이중의 의미로 읽는다. 책에는 이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세 명의 주인공들을 섭외하게 된 과정과 사연이 상세히 담겨 있다. 학살 당시 다낭에 있어 가까스로 학살은 면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땅을 개간하다 불발탄이 터져 시각장애인이 된 응우옌럽, 퐁니?퐁넛 학살에서 오빠를 제외한 온 가족을 잃고 고아로 살아온 응우옌티탄, 하미 학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다낭으로 도망 가 한국군의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온 농인 딘껌, 제작진은 공식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혹은 포착하지 않은 이들의 기억에 다가서며 우리의 기억이 배제해온 다른 기억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끈질기게 묻는다.
책에는 영화에서는 방한 장면에 아주 잠시 등장하는 빈안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떤런의 목소리도 생생히 담겨 있다. 빈안(B?nh An, 平安)은 더 이상 쓰지 않는 지명으로, 학살 이후 ‘평안한 마을’이라는 뜻의 원래 지명을 쓸 수 없다는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 이름을 폐허 위에 마을을 재건했다는 의미를 담은 떠이빈(T?y Vinh, 西榮)으로 바꾸었다. 런 아저씨를 만나 그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서 전쟁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흐르는 꼰 강의 물줄기를 훑으며 촬영감독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풍경의 의미가 뒤집어지는 상황”에 대해 자문한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들은 있는데 죽인 자들은 없으니 누구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용서를 유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