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예언된 나의 슬픔, 오 침묵하는 나의 자유”
감옥에 갇혀 죽었으나 인간의 말을 신뢰하고 시의 언어를 사랑한,
오시프 만델슈탐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세계숨은시인선2)
사랑과 두려움, 추억, 죽음의 초월로 가득 찬 이 높고 외롭고 맑은 목소리. 탁한 바람 속에서 타오르는, 그러나 완전히 꺼지지 않는 성냥처럼 떨리는 목소리. 주인이 떠난 이후 남겨진 목소리. 독자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시인의 목소리.
_조지프 브로드스키(러시아 시인,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으니,// 야수처럼 어두운 영혼/ 참으로 슬프나 아름답다.//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기에/ 아예 말할 줄도 모른다.// 어린 돌고래처럼/ 깊은 잿빛 바다의 세상을 헤엄쳐 나간다.
_<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고> 전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세계숨은시인선2)는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의 시 가운데 총 93편의 시를 선정하여 묶은 시선집이다.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조주관 교수가 번역하고 해설을 썼으며, 러시아문학 전공자이기도 한 이장욱 시인이 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습작기 시절에 접한 만델슈탐 시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러시아어로 쓰인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 만델슈탐은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혁명의 회오리와 문학 논쟁의 와중에서 시대에 반하는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1923년 모든 잡지의 필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1933년 이후 단 한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다가 반스탈린주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뒤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안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주기적으로 정신 발작에 시달리고 궁핍한 환경에 살면서도 만델슈탐은 낙천적이었고 죽을 때까지 결코 농담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강한 부정 뒤에는 인간의 말과 시의 언어에 대한 강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던 것.
시대의 어둠 속에서 억압받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방황했던 러시아 시인 만델슈탐이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대상은 말이다. 그의 말 사랑은 운명적으로 하나의 철학이 된다. 그에게 말은 단순히 언어적 재료의 차원을 넘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리얼리티로 고양된다. 그는 말의 소리, 모양, 의미, 연상, 개성, 메타포, 그리고 말의 힘을 숭배했다. 만델슈탐의 입에서 떨어지는 모든 말은 하나의 결단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자기 존재의 실체를 건 모험이다. 그의 영혼이 그의 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_조주관, 해설 <말의 힘을 숭배한 시인 만델슈탐>에서
말에 대한 만델슈탐의 사랑은 러시아어로 적힌 그의 시를 직접 낭송할 때 보다 잘 알 수 있다. 그의 초기 시집 《돌》과 《비가》는 거의 조각한 듯한 리듬과 운율의 완전성,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각되는 시행의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 요소 때문에 그의 시가 칭송을 받는 것은 아니다. 조주관 교수에 의하면 만델슈탐의 시는 시어와 은유에 있어 독창적이고, 소리와 이미지, 그리고 사상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그는 공허, 공간, 침묵을 묘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며, 날카로운 시대감각과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려 건물을 완성하는 건축가처럼 만델슈탐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시를 써 나갔다. 그의 그런 경향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시적 표현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구밀료프와 아흐마토바 등과 함께 아크메이즘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들 아크메이스트는 상징주의 시 속에 나타난 음악성 우선주의, 모호한 어휘, 막연한 암시, 알 수 없는 절대성의 표현을 거부했으며, 구체적 이미지, 말과 메타포의 정확성, 예술의 구체성, 표현의 명료성을 주장했다. 그들은 ‘명확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느끼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표현의 대상과 감정을 일상생활에서 찾았고, 분명하지 않은 뉘앙스보다는 정확한 의미, 명료한 색채, 조형적 명암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장미가 진정한 무엇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음악이요 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깨뜨릴 수 없는 관계.// 바다의 가슴은 조용히 숨을 쉬나/ 낮은 광인처럼 빛난다./ 흐린 하늘색 그릇의/ 거품이 창백한 라일락 같다.// 태어날 때부터 순결한/ 크리스털 음성처럼,/ 내 입술이/ 태초의 침묵을 얻게 해 주오!// 아프로디테여, 거품으로 남아 있으라/ 그리고 말이 음악으로 돌아가게 하라/ 가슴이여, 마음의 수치를 담아라/ 삶의 근원에서 합쳐진 채로!
_<침묵> 전문
“투명한 페트로폴에서 우리는 죽으리라”
러시아의 릴케, 러시아의 예이츠라 불리는 만델슈탐
뛰어난 서정시에 도시의 시학을 담아내다
약 30년에 이르는 만델슈탐의 시 창작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시집 《돌》(1908~1915)의 시기, 시집 《비가》(1916~1920)와 이 시집에 덧붙여진 1921~1925년 사이의 시들을 아우르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0년대이다. 첫 시집 《돌》부터 마지막 시집 《보로네시 노트》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테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도시의 테마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시는 <페테르부르크 시>이다.
노란빛의 정부 청사 위로/ 뿌연 눈보라가 오랫동안 맴돌고,/ 법률가는 큰 몸짓으로 외투 깃을 여민 후/ 또다시 썰매에 앉는다.// 겨울잠을 자고 있는 기선들. 양지에선/ 선실의 두툼한 유리가 불타오른다./ 정박지의 전함처럼, 괴물 같은 거인/ 러시아가 힘들게 쉬고 있다.// 네바 강가에는 세계 절반의 대사관들,/ 해군성, 태양, 정적!/ 그리고 제국의 빳빳한 황제의 예복이/ 고행자의 옷처럼 초라하다.
_<페테르부르크 시> 전문
페테르부르크(페트로폴)는 만델슈탐의 시적 작업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도시이다. 첫 시집 《돌》에서는 예술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로 나타난다면, 《비가》에서는 건축 모티프와 연결되어 네바 강에 위협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도시를 통해 만델슈탐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그리고 문화의 연속성이다. 이는 바로 자신이 숭배하는 성스러운 전통을 향한, 다름 아닌 러시아의 시적 전통을 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향한 호소에 다름 아니다. 그는 1922년에 쓴 에세이에서 “러시아의 모든 도시는 내 기억 속에서 허구의, 영원히 꿈같은 거리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도시다. 나는 이 가공의 도시를 실재하는 개별적 도시보다 더 사랑한다. 마치 그곳에서 내가 태어난 것처럼, 그곳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사랑한다.”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는 러시아 문화의 양 극단을 대표해 왔다. 18세기 이래로 두 도시는 대립적인 공간으로 표현되었다. 모스크바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오래된 슬라브 전통을 간직한 도시의 이미지를 갖는다면, 페테르부르크는 새로운 서구 도시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또한 모스크바가 혼돈스럽고 무질서하며 아시아적인 도시라면, 페테르부르크는 문명화되고 논리적으로 정연한 유럽적인 도시로 표현된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서 두 도시의 변별성이 많이 소멸된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수도를 모스크바로 다시 옮기면서 신구新舊 구분이 무색해졌다. 20세기에 들어 페테르부르크가 오히려 과거를 대표하는 도시로, 모스크바는 성스럽고 어두운 고대 도시의 이미지에서 현재를 대표하는 활기찬 도시로 변했다. 만델슈탐의 시에도 혁명을 기점으로 모스크바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반면에 페테르부르크는 과거 문화에 대한 상징으로 남은 도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