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정치적이고 목구멍까지 쌉싸름한 맥주 이야기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열기가 무르익을 무렵 화제가 되었던 소식 중 하나가 치킨집과 피잣집의 매출 증가와 함께 이들 음식의 감초격인 맥주 소비의 증가였다. 이처럼 맥주는 전통 술인 막걸리, 소주를 제치고 가장 친숙한 대중주가 되었다. 이제 맥주는 우리 삶의 벗인 것이다.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맥주, 세상을 들이켜다》는, 전 세계인이 함께 마시는 술이 된 맥주의 모든 것을 다룬다. 맥주는 유사 이래 세계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급료로 쓰였으며, 중세 수도원의 생활 양식이자 중요한 자금줄이었다. 근대의 맥주는 노동자와 인텔리 간 소통의 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금주령으로 맞서기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반전 연설을 한 곳이 뮌헨 킨들 홀이라는 맥줏집이었고, 나치스가 창당대회를 연 곳은 뮌헨의 슈테르네커브로이라는 맥줏집이었으며 이곳에서 히틀러는 최초의 정치 연설을 한다.
이 책의 저자 야콥 블루메가 “맥주는 사회와 정치를 떠받드는 강력한 요소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맥주는 공동체의 술이며, 연대의 술이다.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맥주는 쉽게 취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적절한 술이며, 소통의 장을 마련해 공동체의 기초를 튼튼히 해준다. 이처럼 맥주는 역사 속에서 주연은 아닐지 몰라도 주연의 손에 늘 들려 있던 중요한 조연이었다.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술, 맥주의 탄생!
맥주beer, 독일어로 ‘Bier’라는 말은 북부 지방 게르만어 ‘Bere(보리)’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즉 보리로 만든 음료란 뜻이다. 맥주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맥주는 와인보다 먼저 생겨났다. 포도 재배보다 곡물의 재배가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맥주의 기원은 인류 문명의 기원과 함께 한다. 기원전 4000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푸른 기념비Monument Bleu>라는 석판에 맥주 제조법을 남겼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이 되는 길의 하나로 맥주의 발명을 꼽는다. 총 36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 108조는 맥주에 대한 항목으로, 맥주 값은 곡물로 치루어야 하며 맥주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자는 처벌한다고 한다. 또 수메르인은 맥주의 기본 재료와 색깔, 첨가물에 따라 16~20종의 맥주로 구분했다.
고대 이집트에는 술에 취해 구토하는 남녀를 그린 그림이 많다. 당시 취했다는 표현은 당사자가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멘카우레 왕은 취하셨도다!’(각종 정부 공사를 도맡은 이집트 작업반의 팀 이름)라는 이름은 왕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이집트에서 맥주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매개물였으며, 고단한 영혼이 위로를 받고 속세의 근심을 떨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맥주는 임금의 일부로 반드시 노동계약에 포함되었다.
와인을 몹시도 즐겼으며 맥주를 야만의 술이라 칭한 로마인 중에도 맥주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 이는 있었다. 로마인들은 농업과 결실의 여신인 ‘케레스’의 이름을 따서 맥주를 ‘케레비시아’ 혹은 ‘케르베사’라고 불렀으며, 로마 황제 발렌스의 별명 ‘보리술꾼’은 맥주를 마시는 사람을 뜻한다.
맥주의 역사는 동아시아에서도 뿌리가 깊다. 고대 중국에서도 맥주를 마셨다. 중국에서는 쌀로 빚은 술을 새와 물을 나타내는 글자를 합해 ‘삼슈’라고 불렀다. 맥주를 언급한 첫 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의 전설로, 우황제가 궁에서 마신 술이다. 곡물인 쌀을 발효시켜 만든 술도 저자의 눈에는 영락없는 맥주이다. 왜냐면 와인은 과일을, 맥주는 곡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맥주는 애초에 동서양 모두의 술로 탄생했다.
맥주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남부 유럽의 수도원은 와인을 빚었지만, 중부 유럽의 수도원은 맥주를 빚었다. 맥주를 만드는 기술은 6세기부터 수도원의 주도 아래 예술의 경지로 올라섰는데, 강력한 후원금과 풍부한 지식 그리고 시간 덕분이었다. 맥주 기능공의 수호성자가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원 원장 아르놀트일 만큼, 수도원은 맥주 생산의 중심이었다.
수도사들은 맥주에 효모를 첨가하는 기법 등 고급 양조기술뿐만 아니라 홉을 사용하는 법도 처음 개발했다. 우리가 지금 마시는 맥주는 이때 수도사들이 만든 것이다. 수도원은 거대하고 치밀한 생산시설을 바탕으로 다양한 맥주를 생산해 큰 돈을 벌었으며, 나중엔 직접 술집을 운영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겨마시는 맥주 바이헨슈테판은 1143년에 홉을 가지고 맥주를 만들 권리를 얻은 바이헨슈테판 수도원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맥주 양조에서 여성의 활약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스든 메소포타미아에서든 혹은 게르만족이든 맥주를 책임진 것은 여성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맥주의 여신 닌카시가 있었고, 게르만에는 술의 여신 프리가가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맥주를 빚어 이웃 아낙들과 떠들썩한 수다와 함께 취할 때까지 마셔댔다. 또 술집의 대부분을 여성이 경영했는데, 여자가 하는 맥줏집이 성업을 하자 중세의 마녀 사냥꾼은 맥줏집 여주인을 겨누었다. 1590년에는 맥주로 목욕을 했다는 황당한 죄목으로 술집 여주인을 화형시키기도 했다.
중세의 극심한 맥주 양조 경쟁은 맥주에 온갖 첨가물을 섞어넣는 실험을 낳았다. 역청이나 소 쓸개즙, 뱀 껍질, 삶은 달걀, 심지어 죽은 자의 손가락까지. 결국 맥주가 도저히 사람이 마실 만한 것이 되지 못하자, 1516년 4월 23일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4세가 ‘독일 맥주 순수법’을 제정해 맥주의 품질을 지키고자 했다. 보리와 홉과 물로만 맥주를 빚으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 지켜지고 있는 순수법의 기원이다.
맥주를 마신 사람들의 이야기
중세 맥주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술이었다. 무리를 지어 술집을 찾은 손님들은 선창자의 구호에 따라 거의 동시에 잔을 모두 비워야 했다. 어떤 형태든 술판이라면 기꺼이 환영받았으며, 반드시 만취가 해야만 끝이 났다. 취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은 공동체를 모욕하는 망동이었던 것이다.
중세에 맥주를 마시는 일은 수공업자나 농부의 일상이자 의식이었다. 처음 밭에 나온 인부가 잡초를 뽑을 때에는 정해진 양의 맥주는 반드시 마셔야 했으며, 맥주 없이는 마에스터와 도제 사이에 주급 협상을 벌일 수도 없었다. 세례, 출산, 농삿일, 집의 보수 공사, 장례식, 건축 공사까지 맥주를 마실 기회는 차고 넘쳤다.
일하는 사람들만 맥주를 마신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볼로냐에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세워진 이래, 대학의 권위자들이 맥주가 인간을 망치는 해로운 액체라고 하건 말건 대학생들은 만취할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중세의 시민은 누구나 맥주를 빚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양조장에서 사온 맥주를 다 퍼마신 후에는 집에서 빚은 맥주를 꺼내 마셨다.
맥주와 정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14~16시간의 노동을 강요받게 된 후, 언제 어디서나 맥주를 마셔왔던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맥주 대신 화주(독주)를 마시게 되였다. 자유시간이 짧으니 빨리 취하는 화주가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었고, 기업주는 이를 적절히 이용했다. 술에 절어 있는 노동자는 불평할 힘도 정치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주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현상을 낳았고 생산성도 떨어졌다. 에센의 철강기업 ‘크루프’(현재 세계 3위)는 1866년까지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독주를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들로 인해 맥주로 품목을 바꾸어 지급했다. 1909년 사민당은 당원과 동지에게 증류주를 마시지 말자고 호소했는데, 이는 당시의 재무 정책 때문이다. 독일제국의 세법은 증류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여 귀족과 토호의 배를 불려줬다. 이런 상황에서 증류주의 불매운동은 제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