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결코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사회정의와 연대의 언어로 다시 쓴 21세기 『자살론』
자살국가 한국,
그 비극의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자살률 1위. 한국은 OECD 국가 중 이 불명예를 20년 가까이 이어 왔다. ‘자살공화국’이라는 낙인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징표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단과 해법은 여전히 ‘우울증’과 ‘정신 질환’이라는 의료화된 틀에 갇혀 있다. 그런데 과연 자살을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비극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회학자 김명희의 『다시 쓰는 자살론』은 에밀 뒤르케임이 19세기 말 개척한 사회학적 통찰을 21세기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불러낸 문제작으로, 자살을 둘러싼 역사적이고 사회구조적인 힘들을 분석한다. 자살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집단적 고통이자 인권과 사회정의의 문제로 재규정하는 이 책은, 현대 한국 사회의 복잡한 자살현상을 분석할 이론적·방법론적 틀을 제공하는 동시에 의료 중심의 자살담론을 넘어 연대의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한국에서 다시 읽는 뒤르케임,
사회구조의 심장부를 파고든 현대판 자살론
『다시 쓰는 자살론』은 자살을 개인의 정신적·심리적 문제로 환원하는 기존 담론의 관성을 문제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살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권력 관계가 빚어낸 집단적 비극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이 경제적 양극화, 권위주의적 통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 젠더·세대·지역 불평등 등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의 결과임을 여러 통계 자료와 사례 연구를 통해 입증한다.
뒤르케임의 『자살론』에서 심리·생의학적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살의 사회적 발생기제를 포착한 이 책은 한국 맥락에서 자살론을 다시 쓰고,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을 자살론으로 다시 읽는 역방향 모두의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단일 분과 접근의 한계를 넘어서는 통합 분과적 사유를 제안하면서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자살문제의 진단과 해법을 위한 대안적 관점을 모색한다. 이론 없는 자살 연구의 맹목성과 사례 없는 이론 연구의 공허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저자의 이런 시도는 자살 연구의 구체적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숙명론적 자살’ 개념의 복원
현대 한국 사회의 참사와 그 희생자들
분명 뒤르케임의 『자살론』은 미완의 기획이다. 그가 제시한 자살 유형학의 미완성으로 인해 자살의 역사성을 포착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저자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뒤르케임의 자살 유형학에서 저발전된 ‘숙명론적 자살’ 개념을 복원하여 이를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을 분석하는 주요 개념적 자원으로 삼는다.
5·18 희생자와 유가족, 탈북민, 이태원 참사 피해자, 서이초 교사를 비롯한 과로와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간호사·공무원 등 다양한 ‘자살 위기집단’의 사례 연구를 통해 현실 속에서 자살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면밀히 보여 준다. 사회적 통제와 구조적 폭력 속에서 생을 마감한 사례들을 통해 자살이 개인적 선택이 아닌 권력과 제도가 작동하는 ‘죽음정치’의 산물임을 드러내며, 국가폭력·분단구조·열악한 노동환경 등 사회적 맥락을 외면한 자살 분석의 공허함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 자살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연대의 패러다임
그렇다면 자살문제의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인권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자살문제에 접근하는 저자는 그 해법을 ‘연대의 정치’에서 찾는다. 재난 참사 피해자, 직업집단, 사회적 약자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돌봄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개혁이 필수적이다. 또한 서이초 사태 이후 드러난 교사들의 집단적 고통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의 시도는 뒤르케임이 말한 직업집단 연대의 현재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살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 태어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곧 사회정의”이며, 불평등과 배제를 넘어 모두의 존엄이 보장되는 ‘좋은 사회’의 조건을 재설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역설한다. 자살문제에 대한 통합적인 학제적 접근과 시민들의 강력한 연대, 그리고 자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 모일 때, 비로소 한국은 자살국가라는 오명을 벗고 인권에 기반한 생명정치가 약동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