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목쉰 나무의 노래_정과리
함성호 시의 음역은 최저 가청권 아래에 있다. 그것은 세 개의 상황으로 나타난다. 우선, 시인이 스스로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 “가청권을 넘어선 전자기타 소리가 내 운명이라니”(「케리그마Kerygma」)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 전자기타는 깡깡 울리지 않는다. 이어서 시는 말한다. 사바나에서 나타난 기린의 낮은 목소리와 고래들의 대화아주 느린 그림들이 마치 반복을 잊은 듯 고요히 흘러가고 있다 저 소리는 낮고 고요하다. 이 낮고 고요함이 그 음역의 두번째 상황을 지시한다. 그것은 그의 노래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괴롭다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서 너의 이름을 불렀는지 그만, 마음이 흐려져버렸다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와 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노래를 불러 네가 없는 허무를 메웠던지 (「너무 아름다운 병」)에 진술된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속으로(만) 아주 오랫동안 부른 노래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의 노래는 가장 높은 음자리 위를 진동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음파는 몸의 벽에 막혀 내부에서 소진되어버렸다. 그것은 결국 주체를 목쉬게 하여, 음량을 제로치로 만든다. 나의 푸르른 누벽에 새겨진 목쉰 향내와 (「해변 여관」)에서 보이듯, 이제 소리는 내 쉰 목에 있지 않고 누벽에 새겨져 있게 된다. 그러나 그뿐일까? 내부에서 그렇게 소진되어버림으로써 그의 소리는 예기치 않은 또 하나의 상황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 상황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귀에 살이 찌네별의 언덕에서사막의 아파트까지(악취와 함께) (「레몬트리」)저 귀에 찐 ‘살’이 내가 부른 노래의 퇴적물이라는 것은 같은 시의 앞 대목:……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네 에 충분히 지시되어 있다. 귀에 찐 살은 저 사막에 심은 단어들이 화답을 얻지 못하고 쓰레기로 쌓인 것이다. 그 앞면에서 이 상황은, 속으로만 부르는 노래는 내 목에서 소리를 앗아가지만 발화된 음향들은 실물로 남아, 내 안에 쌓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다양하며, 그 편차는 아주 크다. 두 번 거슬러 가면 다시 읽을 수 있는 시구에서처럼 그것은 ‘향내’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거꾸로, 저 앞에서 읽은 시구에서처럼 “마음[을] 흐려”버리고, 금방 읽은 시구에서처럼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이 악취의 원인을 명시하기 위해, 시인은 친절하게 “모든 것들이 썩어가고 있네”라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향내와 썩은 내가 실은 하나이고, 마찬가지로 귓속의 죽은 말들의 퇴적이 동시에 화학 변화를 위해 발효하는 기운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아직 이 세번째 상황의 다른 면을 말하지 않았다. 그 뒷면은 왜 귀 안일까? 라는 물음을 타고 출현한다. 이 물음은 시의 정황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바로 제기된다. 왜냐하면 비록 속으로 부른 노래가 몸 안에만 쌓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굳이 귀에 쌓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말을 한 자이고, 따라서 나의 행동 부위는 귀가 아니라 입이며, 당연히 귀를 행동 부위로 가질 인물은 ‘그녀’로 추정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 물음은 더욱 첨예화된다. 이 물음을 가지고 문제의 시구를 자세히 읽어보자. 그녀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레몬 트리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네 바빌론의 강가에서 나는 고백했지 레몬 트리 레몬 트리, 모든 물결들이 나를 춤추네 이 시구는 ‘나’와 ‘그녀’의 존재 양태를 지시하는 단면들을 겹쳐놓고 있다:(1) 그녀 그녀는 소금에 절여져 있다:―그녀는 바다 속에 잠겨 있다.―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2) 나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한 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한 단어를 가득히(천 개의) 가지고 있다.―(그런데) 나는 사랑의 단어들을 (엉뚱하게도) 사막에 심었다: 나의 언어는 불모성이다.② 나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고백했다.―나는 사막에서 강가로 이동하였다.―나는 고백했다. (무엇을 가지고?)―물결들이 나를 춤춘다.이, 다채롭게 반짝이는 단면들은 얼핏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의 형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녀가 소금에 절여져 있다”는 것은 그녀가 방부(防腐)의 상태로 (아마도) 바다 깊숙한 곳에 잠겨 있을 것이며, 움직이지 못한다, 라는 뜻을 가리킨다. 그녀가 바다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나’가 사막에서 강가로 이동했을 것이다. 물론 강물에는 염분이 없다. 그러나 강가로의 이동은 더 긴 유랑으로 이어진다. 그 유랑의 끝에 ‘바다’가 있다: “그 바닷가, 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레몬 트리 레몬 트리─ 슬픔이 나를 해변으로 몰고 가네” 반면, ‘나’의 행동과 그 결과들은 해석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우선 ‘나’가 사랑을 위한 천 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는 왜 사랑의 단어들을 사막에 심었을까? 시구에 드러난 바로는 ‘소금’에 의해서이다. 두번째 행의 “레몬 트리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 나는”에서의 ‘빛나고’는 ‘빛나기 때문에’라고 읽힐 수 있다. ‘레몬 트리’는 물론 노랫가락이다. 그것은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라는 진술의 정서적 등가물이다. 아무튼 소금이 슬프게 빛난다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단어들을 사막에 심게 하는가? 그것은 사막과 바다 사이에 연관과 단절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암시는 난해하다. 단어들의 기묘한 수사학적 이동을 검토할 때에만 그 암시에서 해답을 건져 올릴 수 있다. 방금 보았던 것처럼 소금은 바다의 은유로서는 그녀를 부동?불변?부재의 존재로서 지시한다. 이때 사막은 염분과 물이 부재한 곳으로서 즉각 바다의 죽음을 가리킨다. 마지막 연: 레몬 트리 레몬 트리, 사막에 귀기울이며 나는 오래 흐르는 물 속에 있네 꽃과 함께 또, 죽음과 함께 에도 나와 있듯이 사막=바다의 죽음은 이 시의 기본 테두리이다. 그 점에서 사막과 바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듯이, 이항대립을 이룬다. 하지만 이 대목도 단순치는 않다. 우선 ‘나’의 위치가 불분명하다. 시구를 그대로 읽으면 ‘나’는 해변에 도착했고 해변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앞의 연에서 “누가 이 바람과 불의 사막에서”를 읽은 독자라면 그가 아직 사막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사막은 ‘이’ 사막이지, ‘저’ 사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는 ‘나’를 사막과 바다에 동시에 위치시키는 모순을 노출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막과 바다를 지리학적으로 읽지 않고 공간학적으로, 다시 말해, 극적 무대로서 읽는 것이다. 시 전체를 통틀어, ‘사막’은 나의 혼자 있음, 귀에 쌓인 것들의 썩음, 그리고 그녀의 부동성을 비추는 공간인 데 비해, 바다 혹은 물은 나와 그녀의 함께 있음(“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의 ‘우리들’), 향기(노랫가락 “레몬 트리”에서 레몬은 무엇보다도 향기의 열매이다), 나의 움직임(유랑, “몰고 가네” “긴 강을 건너”)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전자는 현실의 이름으로 지시되고, 후자는 열망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나’는 몸은 사막에 있고 가슴은 바다에 있다, 라고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막/바다의 대립은 몸/마음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립의 이동은 단순히 대립의 악화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이동선은 오히려 대립의 의미 변화를 발생시키는 선이다. 왜냐하면, 처음의 대립에서 사막과 바다는 서로 극단에 위치할 뿐이지만, 그것이 ‘나’의 신체 안으로 이동함으로써 두 대립자는 동시에 서로를 일깨우는 환기체로서 기능한다. 사막은 바다의 대척지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대척지점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서 곧바로 바다를 생각키우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 귀기울이며”는 이중으로 읽힌다. 즉, “사막에”의 ‘에’는 ‘에서’의 의미로서 ‘사막에서 모랫바닥에 귀를 대고 물소리를 찾는다’로 읽힐 수도 있고, 또는 ‘에 대해’의 의미로서 ‘물속에 들어가 사막으로부터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로 읽힐 수도 있다. 전자로 읽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