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기록
生きものの記録
1955 · 드라마 · 일본
1시간 43분 ·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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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물공장을 경영하는 노인 나카지마 기이치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위협을 피하려면 일본을 떠나야 한다며, 전 재산을 던져 브라질로 이민을 준비한다. 브라질 이민을 결코 찬성할 수 없는 가족들은 그를 한정치산자로 선고해 달라고 가정법원에 신청한다. 가정재판소의 조정위원을 맡고 있는 치과의사 하라다는 나카지마 노인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현실적인 선택으로 한정치산자 선고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나카지마 노인은 핵에 대한 불안과 공포 속에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공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식들을 설득하기 위해 급기야 공장에 불을 지르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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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땅
3.5
전쟁의 상처가 지나간 자리엔 몸 뿐만이 아닌 정신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 끝을 달리는 이야기가 이 옹고집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비친다. 언제 올지 모를 '대규모 폭발'이 마음을 물들여 버렸다. 이게... 전쟁이다. #22.5.24 (558)
연엠
3.5
제목(生きものの記録)의 정확한 번역은 <산 자의 기록>이 아니라 <산 것의 기록>이다. 일본어에서 者와 物은 둘 다 훈독이 もの인데, 이 영화에서 もの는 자기가 겪은 피해 사실조차 망각한, 그래서 가해자로 치환된 비인간적인 인간들을 향한 대명사다. 그러므로 "미친 게 그 환자인가, 이런 시대에 정상으로 살 수 있는 우리들이 이상한 건가"는 비인간적인 가해 당사자들을 향한 물음이다. 이 질문은 피해와 가해의 공존을 겨냥하고 있지만, 그 가해에 일본의 집단적 책임 같은 건 빠져 있다. 가해자도 자기가 받은 피해 앞에서는 한없이 억울하고 답답해지기 마련이니까. 일본은 우리 입장에서는 가해자지만 자기들 입장에선 유례없는 피해자다. 원폭은 그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이상할 만큼 큰 피해였고 앞으로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피해를 잊어야 한다. 잊지 못한 자는 정신병에 걸리며 그 정신병을 생산하는 가해자는 어느 정도는 피해 사실을 잊은 피해자들이었다. 이 과정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선, 마치 영화가 나카지마의 공포가 어디에서 유발되었는지 낱낱이 파헤치지 않고 그저 전시하고 암시하기만 했듯, "그 악몽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던져서도 안되므로, 19~20세기의 일본이 저지른 만행 같은 걸 들먹이며 "지들도 가해자인 주제에"라고 말해선 안 되는 것. 그러나 피해의 재생산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사고의 한계를 재생산의 현장으로 한정하는 일은 완전히 같은 형태의 피해 재생산이다. 현해탄 이쪽에서도 피해는 재생산되고 있으므로. 왜 열도인들은 열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걸까? 공장만 말하는 자식들을 보면 열도인의 사유는 그 한계가 해안선 안쪽에 꽉 매여 있으며 바깥으로 확장하지 못하는 것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 밖을 얘기하는 피해자 나카지마는 제법 상징적인데, 그런 자조차 그저 열도 바깥의 안전을 말할 뿐인 걸 보면 애당초 원폭의 피해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시각과 고찰을 배제하는 전후•현대의 일본, 어쩌면 전전•전중의 일본의 편집증은, 열도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므로, 열도 밖에 대해서도 기껏해야 '안전한 땅'만 생각하는 수준이므로, 정확히 아는 거라곤 비교적 안온했던 국토에 뜬금없이 벌어진 도쿄대공습과 원폭투하 같은 것밖에 없으므로, 다시 말해 아는 게 없으므로, 아예 성찰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던 곳에서만 살아가고자 하는 잘라파고시언들. 여하간 종전 10년이 되기도 전에 이런 치유의 영화를 만든 일본이 부럽기도 하면서, 1954년이라면 일본이 반도의 전쟁으로 큰 득을 보고 미친듯이 성장하기 시작한 초창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역시 상처는 돈으로 치료하는 거라는 만고의 진리를 새삼 되새겼다.
오세일
4.0
전쟁의 참상이 동반한 후유증으로 원자폭탄의 두려움에 대한 피해망상은 이해하지만, 가족과 사회는 그런 한 노인의 기약 없는 두려움을 수용할 현실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아프셔도 오로지 재산상속만을 걱정하는 몇몇 자식들보단, 겉으론 툴툴거리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여도 속으론 그 누구보다 가족들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아버지가 오히려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평소에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강행하는 심술궂은 노인 이지만, 가족을 위해 음료수를 쥐어주는 등 가족을 위해선 어쩔 때는 한없이 약해지는 아버지를 연기한 미후네 토시로의 연기력이 빛난다.
새까칩
4.0
이 영화의 씨앗은 30년 뒤, <란>(1985)으로 아름답게 꽃 핀다.
Ben
4.0
두려움과 반성을 모르며 내달리는 일본에게, 신은 몇십년의 간극 속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두 번씩이나 체험하게 만들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일본이 결국 반성하게 되었느냐'이다.
이태훈
4.0
실감나는 노인 연기를 펼친 미후네 토시로는 1920년 4월 생으로 개봉시점인 1955년에는 30대 중반이었다. 흑백이라 분장의 티가 잘 나지 않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호통을 유지하면서도 불안에 갇힌 노인의 거동이나 표정 등을 표현해내는 연기력이 대단하다.
이동영
3.5
분명히 경고했다.
샌드
3.5
전후 사회를 그림에 있어 사실 이를 어떻게 다룰까 생각하면 좀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여기선 그렇게 걸리는 건 없었습니다. 영화는 가족과 그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람 이야기를 만지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잘 해나갑니다. 결국엔 전쟁으로 남은 상흔에 대한 영화로 보이며, 역시나 그의 영화답게 이야기를 하는 스킬이 워낙 좋아 하고 싶은 말뿐 아니라 해야 보고 싶어하는 것들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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