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원트 비 얼론
You Won't Be Alone
2022 · 드라마/공포 · 영국, 세르비아, 호주
1시간 49분 · 청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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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마케도니아, 200살의 마녀 마리아는 어린 소녀를 납치해 자신의 대를 잇는 마녀로 키우고자 한다. 그러나 16세가 된 네베나 자신과 같아지자 마리아는 흥미를 잃고 그녀를 버린다. 네베나는 버려진 숲에서 우연히 만난 한 시골 여자를 죽이고 그녀의 모습을 취한다. 다양한 인간으로의 삶을 경험하면서 경이로움과 고난에 매료된 젊은 마녀, 네베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며 마을 사람들을 모두를 죽인다. 사라졌던 마리아가 다시 나타나자 마녀의 대를 이어야 하는 자신이 운명 앞에서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2022년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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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땅
3.0
이 마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적임'의 서사 모진 삶이어도,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본능 같은 힘.. 조용하고 잔잔한 느낌이 더 와닿는 듯 하다. #24.5.27 (311)
임중경
4.0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지난한 회귀
Skräckis
4.0
호러 장르물은 아니고 아트 하우스 영화라는 건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공포물 보려다가 뜻밖의 고생을 하는 관객이 없게. (약스포들이 존재) 1. 성장물 팬들에겐 좀 환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우린 이러나 저러나 우리의 몸과 시각을 벗어날 수 없는 편협한 틀 안에서 성장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몸을 갈아타며 시각을 바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건 너무나 환상적인 판타지다. 게다가 주인공은 백지와 같은 상태라 있는 모든 걸 그대로 바라보고, 무엇보다 세상의 아름다움들을 많이 느낀다. 함께 경험하며 가히 황홀했다. 2. 태어나 자라나는 과정에서 전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모든 걸 빼앗겼던 이가 자아를 더듬더듬 찾아가는 이야기다. 세상을 이해하고 자아를 찾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통 무슨 소용이 있는가도 계속 상기시킨다. 세상은 잔인하고 자아는 이용당하고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영화는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심지어 주인공의 이 여정도 얼마나 잔인한지 계속 상기시킨다. 주인공의 여정에는 계속 시체가 쌓인다. 주인공에겐 성장이지만 희생자들에겐 잔인하고 불행한 죽음일 뿐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잊지 않고 정확히 여러번 건드린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마무리 짓는가 했던 이야기는, 그게 불가능함을 희생자들의 얼굴을 되내이며 상기 시킨다. 괴물처럼 잔인한 건 세상이다. 4. 페미니즘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건 작가의 해석이나 의견이 아니라 그 시대에 여자들이 처한 현실은 그냥 끔찍했다. 그걸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상이나 장르가 필요없을 지경이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마녀의 사연마저 보고나면 과거의 모든 여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5. 감점 요소는 대사들이다. 무슨 컨셉인진 알겠는데 언어가 그렇게 서툰 이가 그렇게 말이 많을 필요가 있나. 대사들이 체감 러닝타임을 더 길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대사의 역할이 없는 건 아닌데 대사의 양은 절반으로 줄여도 될 듯 하다. 그래도 마지막 대사는 너무나 적절하다. "그래도...그래도..." 좋은 영화였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정말 잔인한 호러 영화였다. 에효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니 그래도... 그래도...
아무개24
2.0
그렇게 식신마녀가 된다? 마케도니아?의 관혼상제 잘봤다.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다. . 26th bifan
영화시청기계
1.5
아 겁나 재미없다 ㆍ 독백으로 중얼거리는 구린 대사들도 지루하고 느릿느릿한 전개도 긴장감이나 몰입유발 장치없이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스토리도 전부 짜증이 남. ㆍ + 쓸데없이 긴 러닝타임이 답답함과 짜증을 두배로 만든다. +호러요소는 커녕 흔한 긴장감 유발 장치조차 없는데 이딴게 공포장르? 장르 대체 누가 정하는거냐 양심도없지.
film fantasia
2.5
낯선 존재의 눈으로 본 인간이 사는 모습은 참 이상하다. 가만히 관찰하고 일부가 되면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본성을 거스르고 끼워맞추려다보면 번번이 실패하기도. 모성이란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지하인간
4.5
예술은 익숙하기만 한 이 세상과 그 안의 삶을 낯선 이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시선. 더 나아가 거리를 두고 경계하던 낯선 이의 세상과 그 안의 삶까지도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포용의 마음. / 마녀라는 존재 혹은 사회적 낙인으로서의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한 인문학적 연구 주제인 동시에 흥미로운 영화적 소재로도 활용되어 왔다. 마녀 사냥이 가장 활발하게 자행되던 중세 시기에 마녀는 악마와 교접하고 신비로운 마법의 힘을 사용해 마을과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서면서 마녀를 향한 인식은 변화를 마주했다. 이제 마녀는 악마와 교접하는 문란한 존재나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종교적/정치적 계략이나 비합리적 사고 방식과 집단적 광기로 인해 희생된 존재 혹은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 단론이 형성되면서부터는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모든 여성의 삶을 대변하고 여성 간의 연대를 도모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처럼 등장인물을 공포에 빠트리는 악역으로만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역설하기 위한 장치로서도 마녀라는 소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닌> 또한 그러한 영화 중 하나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외딴 산골 마을에 위치한 한 오두막집에 마녀가 나타난다. 갓난아이인 딸과 함께 생활하던 어머니는 갓난아이의 피를 원하는 마녀에게 딸이 처녀가 되면 그때는 데려가도 좋으니 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기다려 달라고 애원한다. 마녀는 어머니의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약속의 증표로 갓난아이의 목소리를 빼앗아간다. 어머니는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처녀가 될 때까지 동굴에 가둔 채로 키우지만 마녀는 그들을 찾아내서 어머니를 죽이고 딸을 데려간다. 마녀는 처녀가 된 아이에게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마녀의 침'을 사용해 그를 마녀로 만들어 버린다. 주인공 네베나는 그렇게 마녀가 되었음에도 마녀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인간 사이에 섞여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목소리도 없이 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은 네베나는 조금씩 인간의 삶을 배우기 시작한다. 줄거리만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듯이 <혼자가 아닌>은 마녀라는 존재를 배척과 박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마녀가 인간을 해치거나 반대로 인간이 마녀를 경계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 일련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마녀를 향한 선입견을 허물고 그들의 사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 작품은 마녀의 인간적인 내면을 드러내면서 마녀도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며 마녀를 마녀이게끔 만든 것은 오히려 그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베나는 악마와 교접하지도 않았으며 신비한 힘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마을과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숨겨서라도 인간 사회에 동화되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네베나를 마녀로 만들었던 '노처녀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네베나와 노처녀 마리아 모두가 그저 처절하게 인간이고팠던 존재였음이 드러난다. 때문에 <혼자가 아닌>은 원초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 열중하기보다는 새로운 형식, 철학적 주제, 사회적 메시지, 섬세한 감정 묘사 등을 통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보다 '향상된' 공포를 보여 주려 노력하는 '엘리베이티드 호러' 장르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싶었을 뿐인 두 마녀의 바람에 집중하여 느린 호흡과 관조적인 시선으로 일상을 관찰하는 이 작품에 점프 스케어와 같이 일차원적인 공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기괴한 이미지와 음산한 음악보다는 산골 마을의 광활한 자연 경관과 미니멀하고 서정적인 피아노의 선율이 영화의 전반적인 톤 앤 매너를 조성한다. 주관에 따라서는 공포 영화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연출적 컨벤션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감각을 곤두세우고 섬세한 감상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동굴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한 마녀의 시선에서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혼자가 아닌>이 마녀를 소재로 한 그 어떤 영화와도 차별화되는 이유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영화가 마녀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역사적 인식의 변화에 맞게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역설하기 위한 장치로서도 마녀라는 소재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 작품 또한 그러한 영화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은 그곳에서 더 나아가 한 번도 시도된 적 없었던 방식으로 마녀라는 소재를 활용한다. 마녀를 '종교적/정치적 계략이나 비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집단적 광기로 인해 희생된 존재' 혹은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주체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인식의 '객체'로만 머물던 마녀를 일상적인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내는 시선의 '주체'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은 이를 통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녀처럼 관객도 각자의 세상을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연출적 의도는 <혼자가 아닌>이 '시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분석해 봄으로써 명확하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시선'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우선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던 고양이가 좌측으로 이동해 프레임을 빠져나가면 외화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고양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카메라는 이제 고양이의 시점으로 들판을 달리고 담벼락을 뛰어넘어 갓난아이인 네베나가 있는 오두막집으로 들어간다. 이는 언뜻 외화면과 시점 쇼트를 활용한 감각적인 연출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변실할 수 있는 마녀의 능력이 밝혀지면서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고양이의 시점 쇼트도 사실은 고양이로 변신한 노처녀 마리아의 시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혼자가 아닌> 속 마녀는 때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바꾸면서 그들의 시선을 체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매번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트럼프는 대선에서 선거 비용으로 2조 1천억 원을 지출했다. 당선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는 미국의 일부만을 겨우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대략 1천억 원 안팎으로 형성되어 있다. 만약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가서 대통령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 감독이 되었다면 동일한 비용으로 미국뿐만이 아닌 이 세상을 적어도 21번은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한 개인에 의해 세상이 21번이나 뒤바뀌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많은 관객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바꾸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왔을 때 바뀌어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영화는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관객의 일상을 예술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그들의 세상에도 일상적인 순간의 아름다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든다. <혼자가 아닌>이 마녀라는 소재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이 작품은 마녀라는 존재를 배척과 박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일깨우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 육체를 바꾸면서 세상을 매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단지 영화 속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관객도 마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시선을 터득하고 세상을 아름다움이 가득한 것으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놀라운 점은 '나'뿐만 아니라 '너'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성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세상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의 옆에 있는 '너'의 세상에도 분명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무리 낯설거나 밉게만 느껴지는 존재라고 해도 그에게도 '나'의 것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인간적인 곳이 되지는 않을까. 알베르 카뮈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그것을 거부하는 세상 사이의 마찰로 인해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때 인간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 그 대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어야만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과연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배척하고 박해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고 화형에 처하는 인간과 그 '다름'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혼자가 아닌> 속 마녀 네베나 중에서 누가 더 인간적인 존재인가? 세상은 그 안에 속한 수많은 인간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속 마녀 네베나는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고 이 세상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도록 돕는 '인간적인' 존재다. 그러니 마녀를 화형시키려거든 너희 중 오직 인간적인 자만 마녀의 몸에 불을 붙여라!
최현진
4.0
(BIFAN) 보편적인 성장 이야기와 신비로운 마녀 이야기를 스타일리시한 연출 안에 매끄럽게 접목시킨다. 몇 년 뒤 무척 주목받는 감독으로 성장해있을지 모를 감독의 야심찬 데뷔작을 만난 듯한 기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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