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리4.0물, 불, 흙을 테마로 삼는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어파이어>는 전작 <운디네>의 정반대에 놓인 것만 같다. <운디네>는 운디네 설화를 통해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소위 ‘역사 3부작’(개인적으로는 안티-파시즘 3부작이라 부르고 싶은)이라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의 자장에 속해 있다. <운디네>는 갑자기 세계의 부재를 겪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그 세계는 운디네라는 인물 자체다. 산업 잠수부인 그에게 운디네(물)은 그 자체로 세계이며 사랑이자 역사다. 수족관이 터지며 물을 뒤집어쓴 두 사람은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물속에서 사랑의 역사를 발견하며 또한 써내려간다. 운디네의 실종은 그에게 세계의 부재 그 자체다. <어파이어>는?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별장에 소설을 퇴고하러 온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세계는 이미 부재하다. 그는 친구 펠릭스는 물론, 별장에 이미 머물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비어)나 그곳에서 알게 된 인명구조원 데비트(에노 트렙스)처럼 지금을 살아가지 못한다. 그의 모든 정신은 그가 붙잡고 있는 소설 『클럽 샌드위치』에 머물러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음이자 시야 바깥의 것이다. 직업적인 것, 혹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요리, 집수리, (여가로서의) 수영 등 모든 것이 일이라고 말하는 펠릭스는 노동과 그 밖의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것만 같다. 호텔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일하며 매일 호텔 식당의 남은 음식을 싸오는 나디아도 마찬가지이며,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며 레온 일행을 만나는 데비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 눈앞에 놓여 있는, 그들의 발로 향할 수 있는 세계에 충실하다. 이는 단순히 여름 바캉스 기간에만 가능한 일탈적 순간은 아니다. 나디아와 데비트는 일하고 있고, 펠릭스 또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별장에 왔다. _ ‘카르페 디엠’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일하는 공간과 순간은 삶과 구별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골몰하는 만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자신의 감각을 뻗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온은 이를 거부한다. 영화 내내 레온에게만 등장하는,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단절을 불러일으키는 점프컷들은 레온이 내세우고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셋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의 시간은 다른 이들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자꾸만 시간이 늦었다고 말하는 레온, 자꾸만 잠들어 일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레온. 영화는 종종 레온의 시점숏으로 다른 이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에게는 작은 소리로 들려와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레온은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화의 내용을 멋대로 곡해한다. 자신에 관한 뒷담화나 자신의 커리어를 망치는 방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고 듣고 읽어낼 줄 모른다. 그를 찾아온 출판사 사장은 그의 원고를 그에게 읽어준다. 원고를 읽는 내내 레온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어처구니없는 문장들의 연속인 원고를 듣는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그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는 세계를 관찰하길, 아니 세계를 대면하길 포기한 소설가의 졸작이다. 레온도 이를 알고 있지만, 이를 ‘자각’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부재상태로 내몰며 창작하지만, 결국 세계가 부재한 창작은 공허할 따름이다. _ 때문에 <어파이어>는 스스로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머저리가 그곳을 잠시 빠져나왔다가도 이내 제 발로 뛰어드는 이야기의 반복이다. 타인이 자신을 몰래 흉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타인을 흉보고 있던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타인이 살아가는 일상이 생산적이지 않으며 무가치한 여가나 저급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게 무의미한 글자 덩어리를 생산한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어파이어>의 도입부는 얼핏 미국의 청춘 호러영화 같다. 청년들이 자동차를 타고 외딴 별장으로 향하고, 자동차가 고장 나 숲길을 걸어간다. 저 멀리서 불타오르는 산불은 보이지 않는 괴물처럼 그들의 시야 저 멀리에 존재한다. 심지어 그것은 아름다운 석양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호러영화처럼 그들이 고립된 상태인 것은 아니다. 다만 레온의 상황만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숲속의 오두막에 투신한 채 괴물을 기다리는 바보나 다름없다. 그렇게 별장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산불이 6월의 함박눈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마침내 별장 인근에 도달하여 살갗의 열기로 느껴질 때, 그제야 레온은 자신 주변을 돌아본다. 물론 별장이라는 극소세계는 흩어지고, 파괴되었으며, 그의 소설처럼 공허가 된 이후다. 레온은 그때가 돼서야 자신의 글에 세계를 맞대어 본다. 미지와 대면한 뒤 살아남은 호러영화의 마지막 생존자가 영화의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처럼.좋아요139댓글2
Jay Oh4.0불안함에 바다도 보지 못하고, 오만함에 불도 보지 못하는 그 한심한 모습 속 어딘가에 내 자신도 있을까봐 생각에 잠겼다. 나는 보고 있는 것일까? The self can be as blinding. 본다는 행위, 보는 주체, 보여지는 대상이 모두 모여야 예술은 완성이 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 역시 이 응시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펫졸드 감독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잔인할지라도 마냥 차갑지는 않은 듯해 늘 흥미롭다.좋아요127댓글2
뭅먼트3.5끝끝내 소실과 결여를 응시하기 시작한 '시선', 어리석음을 연잇게 하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 ⠀ ⠀ ⠀ 🦽 (아래로 결말 스포일러 有) ⠀ ⠀ ⠀ 엔딩에 도달했을 때, 나디아는 나름의 진지한 표정과 제스처로 헬무트의 휠체어를 타고 앞뒤로 움직여본다. 얼핏 보면 그것은 엉뚱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있어서 나디아는 헬무트의 시점과 시선을 정확히 이해하는 한 사람으로 남게 되며, 그녀는 본디 타인에게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무언가를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보는 시점'이다. 나디아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며, 레온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자전거(전후륜)에서 타인의 것인 차(사륜)와 휠체어(좌우륜)로 옮겨지고, 그에 따라 자신의 시점까지 옮겨진다 해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보는 시점'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레온에게는 없고 나디아에게는 있는 강점이다. 그때 레온은 또 다시 몰래 숨어 나디아의 행동을 지켜본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작고 이상한 행동은 레온이 그동안 지녀 왔었던 어리석은 생각과 시선의 정반대에 놓여 있는 행동이다. 레온은 헬무트(타인)의 시점을 이해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레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의 대척점이 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고, 원래의 나처럼 뒤돌아 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레온은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숨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상대방에게 드러낸다'는 말과 동시에 '상대방이 나를 보게끔 한다'는 말 또한 된다. 나디아가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고 기억하려는 방식,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시선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뒤돌아가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레온. 아주 짧은 이 엔딩에 두 사람의 전체적인 맥락이 압축되어 담겨져 있는 듯 보인다. 사랑을 보는 시선과 사람을 보는 시선, 세상을 보는 시선과 현상을 보는 시선, 이 여러 갈래의 시선들은 곧 삶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독일어 원제(Roter Himmel)가 쓰인 포스터를 보면, 나디아와 레온이 아주 가깝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똑바로 대향하거나 응시하지 않고 있다. 마치 소통과 교류의 부재, 사람과 사람 간의 음울한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에 나디아와 레온이 각각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완전히 달랐던 두 개의 시선이 맞물리면서 영화가 끝날 때 묘한 감동과 왠지 모를 온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in my mind-)좋아요114댓글0
이동진 평론가
4.0
불모의 예술과 불능의 사랑으로 허우적대던 자를 폐허에서 소생시킨 한여름밤의 꿈.
CineVet
4.5
스포일러가 있어요!!
STONE
4.5
뜨거운 산불의 잿더미가 차가운 눈처럼 내리듯이, 눈이 멀어버린 자의 창작열은 한없이 냉소적이다.
견주
4.0
오프닝곡 듣자마자 나 이 영화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구리
4.0
물, 불, 흙을 테마로 삼는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어파이어>는 전작 <운디네>의 정반대에 놓인 것만 같다. <운디네>는 운디네 설화를 통해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소위 ‘역사 3부작’(개인적으로는 안티-파시즘 3부작이라 부르고 싶은)이라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의 자장에 속해 있다. <운디네>는 갑자기 세계의 부재를 겪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그 세계는 운디네라는 인물 자체다. 산업 잠수부인 그에게 운디네(물)은 그 자체로 세계이며 사랑이자 역사다. 수족관이 터지며 물을 뒤집어쓴 두 사람은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물속에서 사랑의 역사를 발견하며 또한 써내려간다. 운디네의 실종은 그에게 세계의 부재 그 자체다. <어파이어>는?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별장에 소설을 퇴고하러 온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세계는 이미 부재하다. 그는 친구 펠릭스는 물론, 별장에 이미 머물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비어)나 그곳에서 알게 된 인명구조원 데비트(에노 트렙스)처럼 지금을 살아가지 못한다. 그의 모든 정신은 그가 붙잡고 있는 소설 『클럽 샌드위치』에 머물러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음이자 시야 바깥의 것이다. 직업적인 것, 혹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요리, 집수리, (여가로서의) 수영 등 모든 것이 일이라고 말하는 펠릭스는 노동과 그 밖의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것만 같다. 호텔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일하며 매일 호텔 식당의 남은 음식을 싸오는 나디아도 마찬가지이며,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며 레온 일행을 만나는 데비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 눈앞에 놓여 있는, 그들의 발로 향할 수 있는 세계에 충실하다. 이는 단순히 여름 바캉스 기간에만 가능한 일탈적 순간은 아니다. 나디아와 데비트는 일하고 있고, 펠릭스 또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별장에 왔다. _ ‘카르페 디엠’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일하는 공간과 순간은 삶과 구별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골몰하는 만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자신의 감각을 뻗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온은 이를 거부한다. 영화 내내 레온에게만 등장하는,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단절을 불러일으키는 점프컷들은 레온이 내세우고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셋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의 시간은 다른 이들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자꾸만 시간이 늦었다고 말하는 레온, 자꾸만 잠들어 일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레온. 영화는 종종 레온의 시점숏으로 다른 이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에게는 작은 소리로 들려와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레온은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화의 내용을 멋대로 곡해한다. 자신에 관한 뒷담화나 자신의 커리어를 망치는 방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고 듣고 읽어낼 줄 모른다. 그를 찾아온 출판사 사장은 그의 원고를 그에게 읽어준다. 원고를 읽는 내내 레온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어처구니없는 문장들의 연속인 원고를 듣는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그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는 세계를 관찰하길, 아니 세계를 대면하길 포기한 소설가의 졸작이다. 레온도 이를 알고 있지만, 이를 ‘자각’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부재상태로 내몰며 창작하지만, 결국 세계가 부재한 창작은 공허할 따름이다. _ 때문에 <어파이어>는 스스로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머저리가 그곳을 잠시 빠져나왔다가도 이내 제 발로 뛰어드는 이야기의 반복이다. 타인이 자신을 몰래 흉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타인을 흉보고 있던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타인이 살아가는 일상이 생산적이지 않으며 무가치한 여가나 저급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게 무의미한 글자 덩어리를 생산한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어파이어>의 도입부는 얼핏 미국의 청춘 호러영화 같다. 청년들이 자동차를 타고 외딴 별장으로 향하고, 자동차가 고장 나 숲길을 걸어간다. 저 멀리서 불타오르는 산불은 보이지 않는 괴물처럼 그들의 시야 저 멀리에 존재한다. 심지어 그것은 아름다운 석양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호러영화처럼 그들이 고립된 상태인 것은 아니다. 다만 레온의 상황만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숲속의 오두막에 투신한 채 괴물을 기다리는 바보나 다름없다. 그렇게 별장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산불이 6월의 함박눈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마침내 별장 인근에 도달하여 살갗의 열기로 느껴질 때, 그제야 레온은 자신 주변을 돌아본다. 물론 별장이라는 극소세계는 흩어지고, 파괴되었으며, 그의 소설처럼 공허가 된 이후다. 레온은 그때가 돼서야 자신의 글에 세계를 맞대어 본다. 미지와 대면한 뒤 살아남은 호러영화의 마지막 생존자가 영화의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처럼.
Jay Oh
4.0
불안함에 바다도 보지 못하고, 오만함에 불도 보지 못하는 그 한심한 모습 속 어딘가에 내 자신도 있을까봐 생각에 잠겼다. 나는 보고 있는 것일까? The self can be as blinding. 본다는 행위, 보는 주체, 보여지는 대상이 모두 모여야 예술은 완성이 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 역시 이 응시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펫졸드 감독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잔인할지라도 마냥 차갑지는 않은 듯해 늘 흥미롭다.
뭅먼트
3.5
끝끝내 소실과 결여를 응시하기 시작한 '시선', 어리석음을 연잇게 하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 ⠀ ⠀ ⠀ 🦽 (아래로 결말 스포일러 有) ⠀ ⠀ ⠀ 엔딩에 도달했을 때, 나디아는 나름의 진지한 표정과 제스처로 헬무트의 휠체어를 타고 앞뒤로 움직여본다. 얼핏 보면 그것은 엉뚱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있어서 나디아는 헬무트의 시점과 시선을 정확히 이해하는 한 사람으로 남게 되며, 그녀는 본디 타인에게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무언가를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보는 시점'이다. 나디아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며, 레온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자전거(전후륜)에서 타인의 것인 차(사륜)와 휠체어(좌우륜)로 옮겨지고, 그에 따라 자신의 시점까지 옮겨진다 해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보는 시점'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레온에게는 없고 나디아에게는 있는 강점이다. 그때 레온은 또 다시 몰래 숨어 나디아의 행동을 지켜본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작고 이상한 행동은 레온이 그동안 지녀 왔었던 어리석은 생각과 시선의 정반대에 놓여 있는 행동이다. 레온은 헬무트(타인)의 시점을 이해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레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의 대척점이 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고, 원래의 나처럼 뒤돌아 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레온은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숨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상대방에게 드러낸다'는 말과 동시에 '상대방이 나를 보게끔 한다'는 말 또한 된다. 나디아가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고 기억하려는 방식,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시선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뒤돌아가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레온. 아주 짧은 이 엔딩에 두 사람의 전체적인 맥락이 압축되어 담겨져 있는 듯 보인다. 사랑을 보는 시선과 사람을 보는 시선, 세상을 보는 시선과 현상을 보는 시선, 이 여러 갈래의 시선들은 곧 삶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독일어 원제(Roter Himmel)가 쓰인 포스터를 보면, 나디아와 레온이 아주 가깝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똑바로 대향하거나 응시하지 않고 있다. 마치 소통과 교류의 부재, 사람과 사람 간의 음울한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에 나디아와 레온이 각각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완전히 달랐던 두 개의 시선이 맞물리면서 영화가 끝날 때 묘한 감동과 왠지 모를 온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in my mind-)
진태
4.0
타오르는 남자의 초상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