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Caché
2005 · 드라마/미스터리/스릴러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1시간 58분 · 15세
TV 문학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르쥬(다니엘 오떼유)와 그의 아내 안느(줄리엣 비노쉬)는 중산층 가정의 평온한 삶을 누리며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들에게 자신들의 일상사를 찍은 비디오테이프와 섬뜩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배달되고,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계속 배달되는 비디오테이프와 그림은 점점 더 그들의 은밀하고 사적인 생활들에 관한 내용과 결부되면서 그들의 불안은 증폭된다.
폐허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신앙
‘28일 후 트릴로지’ 패키지 30% 할인 중!
왓챠 개별 구매
폐허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신앙
‘28일 후 트릴로지’ 패키지 30% 할인 중!
왓챠 개별 구매
감상 가능한 곳
본 정보의 최신성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정보는 해당 플랫폼에서 확인해 주세요.



...
4.5
0. 1961년 10월 17일, 세느강에는 200여 구의 알제리인의 학살당한 시체가 내던져져짐. 알제리인에게만 가해진 통금령을 풀어달라고 거리로 뛰쳐나온 알제리인들은 그 길로 진압당함. 시체는 생 미셸 다리 옆에 차곡차곡 쌓였고, 일부는 하구에 둥둥 떠올랐다고. 이 사건은 프랑스 정부, 지식인, 시민의 무관심 속에 은폐됨. 90년대 들어서야 사건은 재조명되었고 생 미셸 다리 옆에 추모비가 세워짐. 그러나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은 채 묻힘. 프랑스의 감추고 싶은 추악한 역사. 1. 이 이야기를 알면 영화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음. 보다 고통스럽게 볼 수 있다는 말. 그러나 이런 영화가 으레 그렇듯 섣부른 폭로전을 차용하진 않음. 천천히 보여줌. 무엇이 나(알제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영화에선 딱 한 번만 언급됨. 마지드의 아버지가 세느강에서 죽었다고. 덕분에 마지드는 알량한 책임감을 느낀 조르쥬의 아버지에게 입양되기 직전에 이르지만, "방을 공유하는 게 싫었던" "겨우 6살"인 조르쥬의 거짓말 때문에 고아원으로 내쫒김. 그 이후 마지드의 삶은 그야말로 소진된 배우의 얼굴로 요약됨. 세월은 흘러 마지드와 조르쥬 모두 자신의 DNA를 세상에 남김. 마지막씬, 둘의 아들이 나누는 대화는 들리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냄. 싸우는걸까. 화해하는걸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은 적어보임. 이 영화 제목 "히든"이 뜻하는 바는 프랑스(유럽)의 감춰진 역사 혹은 가해자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죄책감으로 읽힐 수 있을 것. 이 마음은 매립된지 하도 오래돼 많은 것이 썩었을 것. 형체도 없을 것. 조르쥬의 마지막 말로 미루어봐 확실함. 그래도 바라건대, 저 마음이 썩지 않고 어딘가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를. 스크린 너머에서 두 아들의 대화가 끊이지 않기를. 2. 계속 지단이 생각나는건 왜일까... 우라사와 나오키 풍의 스릴러에 즐거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좋아할듯. 아니라면 스릴러 맞냐며 고개를 갸우뚱할듯.
JE
3.5
미카엘 하네케가 참 장르적인 감독이라 느끼는 게, 불안이나 공포의 묘사만큼은 단연 탁월하다. 특별한 자극 없이 일상을 넘보는 미묘한 균열을 어쩜 이리 잘 포착할까. <퍼니 게임>의 달걀이나 <피아니스트>의 포르노 샵처럼. 이후 <하얀 리본>은 미장센 그 자체로. 본편도 그렇고 대체로다가 극 중 친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어느 친구가 들려준 강아지에 관한 농담 같다. 미스터리의 화법. 농담 같은 외피. 본래 의도를 감춘 접근.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치들이 표면의 서사 대신 이면의 윤리를 떠올린다. 그래서 누가 날 지켜보는가. 사실 그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날 불안케 하는 존재의 정체. 어쨌든 시선이 존재하니 한없는 불안에 떨면 끝일까. 미지의 시선은 죄의식이나 양심으로 환원시키면 되는 걸까. 하지만 세상은 (이미) 양심을 등졌고, 따지고 보면 지켜보고 있는 건 관객인데, (잊고 지낸) 죄의식을 다시 길어다 주는 시선이란 대체 무엇일까. 솔직히 생각건대,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란 없다. <퍼니 게임>의 윙크마저 잠깐을 위협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시선은 만들어진 것,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어쩌면 감독만이 시선의 주체, 즉 비디오를 보낸 범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무력한 시선(의 충격)으로 우리와 세상을 각성시키겠노라는 믿음. 하지만 무력함이라면 난 차라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더 믿는다. 마치 영화 스스로도 어찌할 바 모르는 것만 같던 겸허함. 그에 비해 <히든>의 형식적 장치ㅡ를 통한 윤리ㅡ는 감독만이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누가 비디오를 보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실은 감독 자신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럼에도 또 한 번 피해와 가해가 반복되는 순간의 경악만큼은 (그 행위를 택한 것 자체에 대한 윤리를 떠나) 윤리적으로든 효과적으로든 감각적인 것 같다. 결국 내게 미카엘 하네케의 '섬뜩한 윤리'는 윤리라는 방점보다 그걸 수식하는 장르적인 감각으로 더 기억될 것 같다. 이를테면 개인적으로는 드 팔마 같은 인상. 물론 그 감각이 전력으로 추동하는 이면의 윤리를 떠올리지 않으려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긴 할 테지만, (장르에 더 솔직한 드 팔마에 비해) 어딘가 자의식의 산물처럼 떠다니는 윤리가 괜히 감상을 멈칫케 한다.
감성혁명
4.0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히든]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관객들의 예측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 아무 관심이 없다.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범인이 누구인지가 궁금하다면 당신은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말은 아주 적절하다. . 대체 조르쥬에게 비디오테이프를 보낸 건 누구란 말일까. 그것은 조르쥬의 양심에 희미하게 남은 유년기의 무고에 대한 죄책감과 알제리인 학살을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외면한 프랑스인들의 죄책감을 소환해 환기시키는 영화적 장치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결국 비디오테이프 속의 관점은 한 개인과 한 국가의 치명적 과오를 바라보는 역사적 진실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며, 협박 사건을 다루는 것 같았던 스릴러는 사실 사회고발적 색체를 강하게 띠는 은유적 구조를 가진 드라마로 읽혀져야 햐다. . 영화의 초반부에 조르쥬 부부가 황급히 거리로 나서다가 어느 흑인의 자전거에 치일 뻔 하는 일이 나온다. 조르쥬는 시시비비를 가릴 여유 없이 일방적으로 흑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 시퀀스는 조르쥬의 인간성과 삶의 태도를 단면처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자신이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몰염치의 아이러니... 프랑스 지식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묘사는 이 밖에도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 영화의 하일라이트... 마지드는 조르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집으로 그를 불러들이고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조르쥬 앞에서 자신의 목을 칼로 베며 자살한다. 그 자살은 결백의 증명이자 상대의 오인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자 평생 동안 쌓이고 쌓였던 한(恨)에 대한 처절한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림 속에 피를 내뿜는 아이는 조르쥬가 아니라 마지드였고 저질러진 죄에 벌을 받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 가해와 피해의 반복... . 황망한 상태로 경악한 조르쥬는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현장을 떠나고 비겁하게 자신의 집으로 숨는다. 아내의 설득으로 경찰에 신고한 후에도 조르쥬는 사건이 종료됐음에 안도할 뿐. 직장으로 찾아온 마지드의 아들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당당하고 뻔뻔하다. 어린 시절의 잘못에 대한 사죄는 없다. 진심어린 사죄... 그것 하나만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 . 감기 기운을 느껴 회사를 조퇴한 조르쥬는 암막커튼으로 빛을 가리고는 침대에 눕는다. 다음 장면... 여섯 살 시절, 자신의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차에 태워져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마지드의 비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비명에 조르쥬가 편안히 잠 못 이루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카메라는 롱숏의 롱테이크로 하교시간, 어느 학교의 계단을 비춘다. 계단에 앉은, 또는 선 채로 저마다 무리를 지어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 프레임의 7시 방향에서 가해자의 아들과 피해자의 아들이 무엇인지 모를 이야기를 주고 받지만 관객들은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 이 엔딩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 가해와 피해의 대(代)를 이은 계승일지, 이전 세대가 저지른 죄에 대해 이후 세대가 뒤늦게나마 전하는 사죄일지, 영화는 함구한다. . 다만, 분명한 건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는 것. 잘못이 존재하는 한 개인의 차원, 국가의 차원 둘 다에 있어 진심어린 사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 가해와 피해가 반복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되는 모순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Jay Oh
4.0
이건 누구의 시점인가? 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 되려 질문을 한다. 서서히 답답함과 무거움을 쌓아가는 솜씨. Deconstruction of the point of view.
STONE
4.0
고리타분한 스릴러의 탈을 벗는 순간 영화는 더욱 견고해진다.
이동진 평론가
4.0
스크린을 칼로 찢는 듯한 충격.
다솜땅
3.5
긴장감있게 다가오긴 했지만 그 집안의 일, 그리고 조르쥬와 안느의 일상속에 파고드는 테이프 그리고 그림! 조르쥬의 과거의 일을 아는건 마지드 밖에 없는데... 계속해서 옥죄어 오는 과거의 그림자, 6살의 기억으로 다 말할수 없는 과거.. 2번을 보아도 나로서는 불안한 느낌과 안타가운 죽음으로만 비춰진다. 단지, 누가 왜 그런짓을 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20.2.25 (442)
허문영 평론가 봇
유럽 부르주아의 극단적 자기혐오 전시하는 <히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 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라고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 테이프 때문에 한 가족 전체가 신경쇠약에 이르렀고, 한 불행하고 착한 사내는 자살했다. 그러니 감독에게 멍청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해도 묻고 싶다. 도대체 누가 테이프를 보냈을까. <히든>의 이야기는 ‘누가 그랬을까’를 관객이 궁금해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스릴러다. 영화의 시작은 파리의 중산층 주택을 고정카메라가 한참 비추는 장면이다. 이 화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곧 문제의 비디오테이프 화면임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비디오 화면 속의 주택에 사는 조르주와 안느 부부다. 조르주는 책 소개 프로그램을 맡은 방송인이며, 안느는 출판사에 근무한다. 그들에겐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피에로가 있다. 그들이 본 테이프는 문 앞에 놓여 있었고 보낸 사람은 알 수 없다. 낮 동안 조르주의 집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그 테이프에는 간혹 오가는 사람들과 사소한 소음들 외엔 특별한 게 없다. 조르주의 짓궂은 팬의 짓일까? 아들 친구의 장난일까? 조르주 부부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편함과 가벼운 불안감에 휩싸인다. 테이프는 계속 배달된다. 밤에 조르주의 집을 촬영한 두 번째 테이프에는 사람의 목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조악한 그림이 동봉돼 있다. 첫 번째 테이프를 무심하게 넘긴 조르주는 그 그림을 보고 잊고 있던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점차 신경이 예민해진다. 세 번째 테이프에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조르주의 시골집이 담겨 있고 닭의 목을 따는 그림이 함께 배달된다. 극도로 예민해진 조르주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짐작한다. 네 번째 테이프는 누군가의 집에 이르는 경로가 찍혀 있다. 테이프의 단서를 따라 조르주는 그 집을 찾아내고, 마침내 그가 발신자로 짐작하던 인물을 그곳에서 만난다. 그 인물은 알제리 출신의 마지드라는 중년 남자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마지드는 그늘이 있지만 온화한 얼굴을 지녔다. 그는 테이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조르주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조르주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지드 집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장면이 담긴 테이프가 도착해 있다. 아내의 추궁에 조르주는 마지드와의 인연을 고백한다. 마지드는 옛날 조르주의 집에서 일하던 알제리인 부부의 아들이었다. 마지드의 부모는 알제리인 200명이 센강에 수장된 1961년 학살 사건 때 죽었다. 조르주의 부모는 마지드를 입양하려 했으나 자기 것을 나누기 싫었던 어린 조르주는 마지드를 모종의 거짓말로 쫓아냈다. 조르주는 아내에게 마지드의 집 안에서 촬영된 이 테이프가 바로 마지드가 범인이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느는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들 피에로가 실종된다. 부르주아적 신경증의 치밀한 묘사 줄거리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여기까지 오프닝게임이었다면 여기서부터 본게임이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선 마지드가 범인이라고 믿기 힘들다. 나중에 등장하는 마지드의 아들이 범인이라고 믿기도 힘들다. 신경질적이며 불안정한 조르주 가족에 비하면 두 알제리인 부자는 훨씬 건강하고 맑은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느의 말대로 마지드는 자기가 촬영하면서 그같은 연기를 할 사람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누가 보낸 것인가. 먼저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을 인정해야겠다. 하네케는 징그러울 만큼 솜씨 좋은 감독이며 여전히 부르주아적 신경증 묘사의 대가다. <피아니스트>에서 엄마를 가둬놓고 이자벨 위페르와 브누아 마지멜이 벌이는 폭력적 정사장면은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히든>에서도 세련되고 안정된 중산층 가정이 불안을 거쳐 신경쇠약에 이르는 과정을 현미경 같은 관찰력으로 그려낸다. 그들의 정신은 종잇장처럼 얇아 평온을 깨트리는 작은 소란도 견디지 못한다. 현금계산기의 인쇄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누군가가 코 푸는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예민한 그들에게 도착한 것이 다름 아닌 비디오테이프라는 건 흥미롭다. 어떤 특정한 사건도 담겨 있지 않은 이 테이프는 시선 자체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치 설정이 첫째와 둘째 테이프의 전부다. 조르주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 시선의 일방성이다. 그는 나를 보는데 나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 이 응시의 불가역성 혹은 응시의 객체로서의 전락을 이 유럽 부르주아는 견딜 수 없다. 조르주의 직업이 방송 진행자이자 프로듀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TV를 통해 보여지지만 편집실에서 보여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권력자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테이프에서는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 <히든>은 여기서 시선의 권력을 현실 권력의 문제와 연관시킨다. 테이프에 담긴 시선의 주체가 알제리인이라고 조르주가 상상할 때 그것은 3세계에 대한 1세계의 죄의식과 1세계와 3세계의 권력 전도에 대한 공포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제3세계 수탈과 경제적 우위가 토대가 된 서구의 미디어 지배가 1세계를 응시의 주체, 3세계를 응시의 객체로 고착시켰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설정도 흥미롭다. 비디오테이프를 탄생시킨 것은 조르주의 죄의식 하지만 마지드의 집을 알려주는 네 번째 테이프가 도착하면서 영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제 테이프들은 조르주의 상상을 현실화하는 직접적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다섯 번째 테이프는 마지드의 방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그 방에 있던 누구도 그것을 찍은 바 없다. 그러니 이 테이프의 제작은 불가능하다. 마지드의 끔찍한 자살이 있고 나서는 비디오와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조르주가 잠자리에 든 뒤에 40여년 전 마지드가 고아원에 끌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것은 마지드의 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비디오테이프일 수도 있지만 그 구분은 불가능하다. 테이프는 이제 시공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미카엘 하네케는 자신의 출세작 <퍼니 게임>을 할리우드 스릴러에 대한 패러디라고 했다. <히든>은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호러에 대한 패러디다. 테이프는 귀신이거나 괴물이다. 그것은 조르주라는 유럽 부르주아의 억압된 기억이 귀환해 물질화한 것이다. 귀신으로 부르는 이유는 <히든>을 사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한 서사 논리 안에서 그 테이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드 부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 테이프를 만들 수 있는 건 조르주의 죄의식밖에는 없다. 그의 죄의식은 때로 그가 거짓으로 기억하고 있는 피를 토하거나 자신을 위협하는 어린 마지드의 모습으로 되살아오기도 하고, 마지드가 고아원으로 끌려가는 ‘평화로운’ 이미지로 되살아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거짓말이 추방한 40여년 전의 인물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드는 비디오테이프로 되살아온다. <퍼니 게임>에서 하네케가 패러디를 수행하는 방식은 텍스트의 경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두 살인범 중 하나가 살인 모의를 하기 전에 관객을 향해 눈을 찡긋한다. 그 눈짓은 텍스트의 경계를 넘어 관객을 안전한 관음자의 자리에서 끌어낸다. 또한 살인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아 동료가 죽어버렸을 때, 비디오를 리와인드하는 듯한 화면이 나온 뒤 몇초 전으로 돌아간 두 범인은 다시 살인을 시도한다. 이번엔 성공한다. 관음자와 관음 대상의 안전한 자리를 뒤흔들면서, 재현은 장난이 되고 살인은 비디오게임이 된다. <히든>의 등장인물들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이 게임에 갇혀 있다. 누가 이 테이프를 보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조르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낸 그의 죄의식은 그러나 사악하다. 정체불명의 비디오테이프는 조용히 살아가던 피해자 마지드를 색출해 결국 그를 자살로 내몬다. 조르주는 아내에게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결국 마지드가 바라던 대로 되었군. (테이프와 함께 배달된 그림에서처럼) 자기 목을 그은 건 지독히 뒤틀린 농담 아닌가.” 제3세계를 유럽의 타자로 고정시키는 묘사 마지드의 행위가 아니라 <히든>이 지독히 뒤틀린 농담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낸 죄의식은 실은 위장된 죄의식이다. 죄의식을 가장한 극단적인 이기성, 거의 종교적인 에고이즘이다. 죄의식의 이면에서 작동한 이기적 목적이 완성됐을 때, 조르주는 편히 잠든다. 피에로의 학교 앞을 비디오 화면처럼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새로운 테이프의 생성을 암시하지만, 조르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며칠 동안 신경쇠약에 걸렸다가 죄의식의 대상이 제거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참회해야 할 역사적 사건을 끌어들이면서도 어떤 역사적 진전도 윤리적 각성도 부인하는 이 극단적인 냉소주의와 자기혐오는 근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제스처로 느껴진다. <히든>에서 가장 동의하기 힘든 것은 마지드 부자에 대한 묘사다. 성자 같은 표정의 마지드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지드의 아들은 조르주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았어요. 고아원에선 사랑보다 증오를 가르치죠.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잘 키우셨어요.” 자신이 추방한 타자를 이처럼 무기력할 만큼 고결한 인물로 묘사하는 건 악마로 묘사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3세계를 소통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로 고정시킨다. 마지드 부자는 나의 죄의식과 긴장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나의 사악함을 완성하는 도구다. <히든>은 자기비판이 아니라 자기혐오를 전시하는 노출벽의 영화이며 유럽 부르주아의 자학게임이다.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