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t4.0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색 찬란한 옷을 입은 사미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 장면이 전달하는 아름다움과 애틋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는 환경 파괴와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미인들의 삶을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한다. 카메라로 지도를 그리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영화가 연상되는 측면이 있으나 페터 네슬러의 카메라는 풍경화가 연상될 정도로 엄격한 구도로 프레임을 구획하는 동시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방식으로 열려있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를 포함해서 시정이 넘치는 순간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페터 네슬러의 카메라는 무엇보다 정직하다. 정직한 카메라의 힘을 웅변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좋아요9댓글3
로트링겐5.0그렌베르거: 〈그리스로부터〉(1966)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그리스의 저항 운동에 대한 영화입니다. 네슬러: 이 영화는 파파도풀로스의 독재로 이어진 쿠테타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64-65년의 상황을 다룹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매우 긴장된 시기였습니다. 저는 시위를 촬영하는 한편, 독일 점령기와 독일에 대항했던 저항 운동의 흔적들, 역사적 흔적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현지 촬영 경험은 어땠나요?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작업 방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다이렉트 시네마’라고 불리는 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네슬러: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고, 영화를 만드는 흥미롭고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렌베르거: 스트로브는 이 영화를 ‘미학적-테러리즘(esthetisch-terroristisch)’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표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슬러: 글쎄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효과를 주었고, 강력한 도발이었다는 뜻이겠죠. 목소리, 노래의 파편들, 그리고 사운드가 동반되지 않는 이미지들, 이것들은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를 이루던 시대에 당연히 매우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왜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게 되었나요? 네슬러: 우리는 촬영 기간 동안 사운드를 녹음하기 시작했지만,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것들이 무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몇 통의 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처형을 앞둔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였습니다. 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담긴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나무 이미지는 해당 편지와 대응할 것을 염두에 둔 상태로 촬영되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오버하우젠에서는 이 영화를 ‘공산주의적 졸작’이라 평했습니다. 네슬러: 아뇨, 그건 영화 산업의 지면인 필름에코(Filmecho)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오버하우젠에서는 상영을 방해하려는 시도만 있었습니다. 물건들이 공중에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람스테드트: 영화를 본 특정 집단이 그랬던 것인가요? 네슬러: 아닙니다. 보통의 영화제 관객들이었습니다. 다만 늦은 상영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그리고 이 영화로 인해 독일에서의 제작 지원이 끊겼고, 당신은 더 이상 제작비를 받을 수 없게 되어, 1966년 12월 스웨덴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슬러: 저는 가족을 통해 스웨덴과 연고가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많은 사람들이 〈루르 지역에서〉(1967)가 당신의 가장 공격적인 영화들 중 하나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독일 영화 역사 연구자 에노 파탈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패배의 파노라마’라고 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보시나요? 네슬러: 아뇨, 그 영화는 제가 읽은 것, 루르 지역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알게 된 것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저항 단체의 생존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울함을 느낍니다. SA에게 폭행당한 뒤 그들이 도시를 걸어갈 때, 마주친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너무 만신창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일말의 공격성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패배와 반란, 루르 적군 그리고 저항 운동을 묘사할 뿐입니다. 또한 처형이 이뤄지는 와중에도 전단을 배포하고 신속히 도주하며 활동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렌베르거: 간과되었다고 느끼는 역사들을 찾아내고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껴 오셨나요? 이것이 당신의 영화 작업에서 체계적인 접근이 되었나요? 네슬러: 항상 그런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늘 제가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잘 알지 못했던 흔적들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북방의 모자〉(1990)에서는 독일이 퇴각할 때 모든 것이 파괴되었던 방식, 초토화 작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폭파된 콘크리트 벙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이에 대한 아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시 SVT(스웨덴 공영방송국)의 환경은 실험적이고 관대했나요? 네슬러: 네, 관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형식과 정치적 표현 모두에 있어 제한선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꽤 초창기에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1971)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네오파시즘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집시로 산다는 것〉(197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저는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방영되었고, 저는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도 이어서 진행했지만, 이 영화는 저지당했습니다. 방영 하루 전날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때 이사회가 영화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사회민주주의가 네오파시즘이 성장하도록 방치했다는 점, 그들이 여기 스톡홀름에서 부분적으로 이뤄진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의안은 연합군의 합의에 따라 파시즘을 뿌리부터 박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네오파시즘은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로 붙여진 이유입니다. 그때 채널2에는 정책 그룹이 있었고,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영화는 결국 방영될 수 없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신은 자주 하나의 대상 혹은 사물을 다뤄왔습니다. 그것은 더 큰 사회 구조나 문제들의 존재론적 복합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떤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슬러: 하지만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로셀리니가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위해 철강 산업에 관한 10부작 시리즈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저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핵무기 개발을 표현한 〈위험한 지식〉(1984)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두 가지, 생산의 역사를 통해 총체적 사회진화를 다루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산의 역사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종류의 생활 환경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제약에 시달렸는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 - 일환 옮김 --- 흔적들: 페터 네슬러와의 대화 2012, 마르틴 그렌베르거, 스테판 람스테트 전문: https://lothringenseoul.com/peter-nestler-walden-2012좋아요8댓글0
Ordet
4.0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색 찬란한 옷을 입은 사미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 장면이 전달하는 아름다움과 애틋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는 환경 파괴와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미인들의 삶을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한다. 카메라로 지도를 그리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영화가 연상되는 측면이 있으나 페터 네슬러의 카메라는 풍경화가 연상될 정도로 엄격한 구도로 프레임을 구획하는 동시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방식으로 열려있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를 포함해서 시정이 넘치는 순간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페터 네슬러의 카메라는 무엇보다 정직하다. 정직한 카메라의 힘을 웅변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로트링겐
5.0
그렌베르거: 〈그리스로부터〉(1966)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그리스의 저항 운동에 대한 영화입니다. 네슬러: 이 영화는 파파도풀로스의 독재로 이어진 쿠테타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64-65년의 상황을 다룹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매우 긴장된 시기였습니다. 저는 시위를 촬영하는 한편, 독일 점령기와 독일에 대항했던 저항 운동의 흔적들, 역사적 흔적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현지 촬영 경험은 어땠나요?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작업 방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다이렉트 시네마’라고 불리는 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네슬러: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고, 영화를 만드는 흥미롭고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렌베르거: 스트로브는 이 영화를 ‘미학적-테러리즘(esthetisch-terroristisch)’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표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슬러: 글쎄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효과를 주었고, 강력한 도발이었다는 뜻이겠죠. 목소리, 노래의 파편들, 그리고 사운드가 동반되지 않는 이미지들, 이것들은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를 이루던 시대에 당연히 매우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왜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게 되었나요? 네슬러: 우리는 촬영 기간 동안 사운드를 녹음하기 시작했지만,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것들이 무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몇 통의 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처형을 앞둔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였습니다. 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담긴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나무 이미지는 해당 편지와 대응할 것을 염두에 둔 상태로 촬영되었습니다. 그렌베르거: 오버하우젠에서는 이 영화를 ‘공산주의적 졸작’이라 평했습니다. 네슬러: 아뇨, 그건 영화 산업의 지면인 필름에코(Filmecho)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오버하우젠에서는 상영을 방해하려는 시도만 있었습니다. 물건들이 공중에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람스테드트: 영화를 본 특정 집단이 그랬던 것인가요? 네슬러: 아닙니다. 보통의 영화제 관객들이었습니다. 다만 늦은 상영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렌베르거: 그리고 이 영화로 인해 독일에서의 제작 지원이 끊겼고, 당신은 더 이상 제작비를 받을 수 없게 되어, 1966년 12월 스웨덴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슬러: 저는 가족을 통해 스웨덴과 연고가 있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많은 사람들이 〈루르 지역에서〉(1967)가 당신의 가장 공격적인 영화들 중 하나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독일 영화 역사 연구자 에노 파탈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패배의 파노라마’라고 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보시나요? 네슬러: 아뇨, 그 영화는 제가 읽은 것, 루르 지역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알게 된 것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저항 단체의 생존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울함을 느낍니다. SA에게 폭행당한 뒤 그들이 도시를 걸어갈 때, 마주친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너무 만신창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일말의 공격성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패배와 반란, 루르 적군 그리고 저항 운동을 묘사할 뿐입니다. 또한 처형이 이뤄지는 와중에도 전단을 배포하고 신속히 도주하며 활동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렌베르거: 간과되었다고 느끼는 역사들을 찾아내고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껴 오셨나요? 이것이 당신의 영화 작업에서 체계적인 접근이 되었나요? 네슬러: 항상 그런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늘 제가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잘 알지 못했던 흔적들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북방의 모자〉(1990)에서는 독일이 퇴각할 때 모든 것이 파괴되었던 방식, 초토화 작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폭파된 콘크리트 벙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이에 대한 아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시 SVT(스웨덴 공영방송국)의 환경은 실험적이고 관대했나요? 네슬러: 네, 관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형식과 정치적 표현 모두에 있어 제한선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꽤 초창기에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1971)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네오파시즘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집시로 산다는 것〉(197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저는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방영되었고, 저는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도 이어서 진행했지만, 이 영화는 저지당했습니다. 방영 하루 전날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때 이사회가 영화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사회민주주의가 네오파시즘이 성장하도록 방치했다는 점, 그들이 여기 스톡홀름에서 부분적으로 이뤄진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결의안은 연합군의 합의에 따라 파시즘을 뿌리부터 박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네오파시즘은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그들이 다시 와도 되는가?’로 붙여진 이유입니다. 그때 채널2에는 정책 그룹이 있었고,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영화는 결국 방영될 수 없었습니다. 그렌베르거: 당신은 자주 하나의 대상 혹은 사물을 다뤄왔습니다. 그것은 더 큰 사회 구조나 문제들의 존재론적 복합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떤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슬러: 하지만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로셀리니가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위해 철강 산업에 관한 10부작 시리즈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저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핵무기 개발을 표현한 〈위험한 지식〉(1984)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두 가지, 생산의 역사를 통해 총체적 사회진화를 다루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산의 역사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종류의 생활 환경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제약에 시달렸는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 - 일환 옮김 --- 흔적들: 페터 네슬러와의 대화 2012, 마르틴 그렌베르거, 스테판 람스테트 전문: https://lothringenseoul.com/peter-nestler-walden-2012
규현
4.0
“지구는 심각한 탈모 위기에 처해 있다. 더 이상 북방의 모자는 없다.“ - 장-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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